디카로 본 세상

세계의 문화유산 조선왕능 1 [서오능] 명능

사공(최명규) 2012. 9. 2. 22:57

[서오능] 명능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소재한 조선시대 왕릉.


사적 제198호. 5릉은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을 일컫는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그밖에 이곳에는 雌씬� 큰아들인 순맑셈愍�

순창원(順昌園)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의 대빈묘(大嬪墓)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족(石足)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連珠紋)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머리 밑에 환상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등, 옥개를 4각형으로 제도화했다.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제도나 석물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왕릉경릉(敬陵)은 덕종과 정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추존왕이며,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이다.
창릉(昌陵)은 조선 제 8대 왕인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이다.
익릉(翼陵)은 조선 제 19대 왕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다.
명릉(明陵)은 조선 제 19대 왕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홍릉(弘陵)은 조선 제 21대 왕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편집] 원(원소)과 묘순창원(順昌園)은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묘이다.
수경원(綏慶園)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묘이다. 원래 경기도 고양의 옛 연희궁 자리(현재의 서울시 신촌동)에

위치하였으나 1968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1]
대빈묘(大嬪墓)는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묘이다. 원래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문형리에 위치하였으나 196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2]

[관련 싸이트에서]

 

 

 

 

 

명릉

19대 숙종(肅宗)
능호 : 명릉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조성시기 : 1701년(숙종 27)능의구성
명릉은 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두 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능의역사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1701년(숙종 27) 승하하자 숙종은 능호를 명릉이라 하여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영하였다. 조영 당시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라는 우허제(右虛制)를 전교하였다. 1720년(숙종 46)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숙종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인현왕후의 오른쪽 빈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승하 후 두 번째 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관련 싸이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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