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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유적 탐방 1부 (고양향교~최영장군묘~경안군묘)

사공(최명규) 2023. 3. 1. 16:43

고양향교(高陽鄕校)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위치한 향교이다. 1985년 9월 20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숙종 때 창건되었으며, 한국 전쟁 때 소실된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다.

개요[편집]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처음 지었으며, 이후 자세한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건물 배치는 교육 공간을 앞쪽에, 제사 공간을 뒤쪽에 둔 전학후묘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앞쪽에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으며,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교관이 머물던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위키백과에서]

이번 걸음은 의주길을 완주 했는데 문화유산 스템프 최영장군묘가 찍히지 않아서 고양향교로 해서 최역장군 묘릉 방문하고 필립핀군 참전 기념비까지 갈 계획으로 11시쯤 온수역에서 만나 의주길 제2길 출발점에서 걷기를 시작해서 고향향교에 도착한다, 그런데 닫혀 있든 향교문이 활짝 열려있어 입장해도 되느냐?  사진 찍어도 되느냐? 물엇는데 된다고 해서 처음보는 향교풍경을 열심히 다니며 카메라에 땀는다, 분주하게 일하는 분들이 궁금해서 오늘이 무슨 날임니까? 물었는데 봄 가을로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는데 오늘이 그날이라 했다, 우리가 방문 했을때는 모든 행사가 끝나고 일하는 사람들만 남아 뒷 정리를 하는 중이였다, 우리가 일찍 왔다면 재래의식을 볼 수 있엇을 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향교 내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향교(鄕校)는 조선 시대 지방에 세운 공립 교육 기관으로, 중국 공자(孔子)와 여러 성현(聖賢)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향교는 공자를 모시는 대성전(大成展)과 선현을 모시는 동무ㆍ서무(東廡ㆍ西廡), 학생들의 강학소인 명륜당(明倫堂)과 그들이 기숙하는 동재ㆍ서재(東齋ㆍ西齋)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고양 향교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건립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불타 없어졌다가, 1595년에 다시 지었으며, 1689년 왕명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 때 불타버린 명륜당, 전사청, 외삼문은 1984년에 새로 만들었고, 그 외 건물들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고 한다. 고양 향교는 경사 지형을 2단으로 조성하여 앞쪽에는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뒤쪽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을 두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人(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전사청은 서무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있다.[경기도 문화재자료]

대자산 정상 화재 감시 초소에서 근무하시는 분의 양해를 고하고 한장 ?--------

최영(崔瑩, 1316년 ~ 1388년)은 고려 말기의 장군 겸 정치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아버지는 최원직(崔元直)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鳳山智氏)이다.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우왕의 왕비인 영비 최씨는 그의 서녀였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우왕은 그의 서녀 영비 최씨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 이후 우왕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다.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과 재물을 멀리하였다. 사위는 사공민(司空敏)이고, 손녀 사위는 조선 초기에 좌의정을 역임한 재상 맹사성이다.

생애[편집]생애 초반[편집]

최영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지낸 최유청(崔惟淸)의 5대손이며 최원직(崔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최영은 사헌부 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그의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유훈(遺訓)을 받은 후 최영은 이를 그대로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하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풍채가 늠름했으며 용력이 출중하여 문신 가문에 태어났으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술을 익히어 무장의 길을 걸었다.

관료 생활[편집]변방 수비와 쌍성총관부 공격[편집]

처음에는 무인으로서 양광도 도순문사(都巡問使)의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며, 우달치에 임명되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음력 9월에 조일신의 역모를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진압하여 호군(護軍)으로서 출세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는 80년 넘게 원나라(元)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354년(공민왕 3년) 중국 산동 지역에서 장사성(張士誠) 등의 홍건적이 원 조정에 반기를 들자 원은 고려에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조정군(助征軍)을 요청했는데, 이때 최영은 대호군(大護軍) 대장군으로서 류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과 함께 병력 2천 명과 함께 출정했다. 이때 그의 나이 39세였고 원에서 대기 중이던 고려인 2만 명을 합류시켜 지휘하였다.

1355년(공민왕 4년)에 원정에서 돌아온 최영은 왕명으로 예전 원에게 침식된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서쪽으로 압록강을 넘어 요양에 이르는 실지 회복에 나섰다. 쌍성총관부 전투에서 등장하는 자가 바로 이성계와 그의 아버지 이자춘으로 최영은 이 두 사람의 도움으로 쌍성총관부를 되찾을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이후 고려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위키백과에서]

원나라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홍건적과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우외환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등을 돌린 공민왕을 밀어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자, 기황후의 지원을 받은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1364년에 고려로 쳐들어왔다.[1] 그러나 이 침략도 최영이 처리하였다. 그러나 최영과 고려가 맞서 싸워야 했던 적은 원나라만이 아니었다. 북쪽 지방에서는 홍건적이, 남쪽 지방에는 왜구가 창궐하였다.

공민왕 7년(1358년)에는 양광·전라도 왜적 체복사(倭賊體覆使)가 되어 오예포(吾乂浦 : 장연)에 침입한 왜구 4백여 척을 격파하고,[2]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왜구가 교동(喬桐)·강화(江華)를 노략질하자 동서강도지휘사(都指揮使)로 왜구를 대적, 경계하였다.[2] 그러나 공민왕 14년(1365년) 3월 11일 창릉에 침입한 왜구가 세조의 어진을 훔쳐가는 사건이 벌어지고, 직후 동서강도지휘사는 김속명으로 교체되었으며, 이때 세조의 어진을 왜구에게 도난당한 것이 빌미가 되어 신돈에 의해 계림부윤(鷄林府尹)에 좌천되었으나, 1371년(공민왕 20년)에 신돈이 처형되고 그 일파가 몰락하자 곧 소환되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다.[위키백과에서]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 1644년 10월 5일 ~ 1665년 9월 22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3남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회(檜), 초명은 석견(石堅)이다. 따라서 일부 문헌에서는 경안군 이석견(李石堅)으로도 부른다. 소현세자의 아들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소현세자 사후 1646년 민회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혐의로 사사된 뒤, 연좌되어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숙부 효종 즉위 후 1656년 석방되고, 1659년(효종 9년) 윤 3월 4일 복권되고 경안군에 봉작되었다. 생전 관직은 승헌대부에 이르렀고, 사후 증 현록대부에 추증되었다.

생애[편집]

1644년 10월 5일 심양 산해관 질관(質館)에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석견이었는데, 인조 재위기간 중에는 석견으로 나타난다. 아버지 소현세자가 나라에서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어머니 민회빈 강씨는 1646년 인조의 수라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아 죽고, 이후 두 형 석철, 석린과 함께 4세의 어린 나이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한다. 형 석철, 석린이 잇달아 죽자 인조는 1649년 3월 17일 그를 육지와 가까운 해도(海島)로 옮겨 안치하라 했으나, 명이 도착하기 전에 인조가 죽었다.

1650년(효종 즉위년) 강화도로 이배되었다가, 1656년 석방되어 귀양에서 풀려났다.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인조 때까지도 이름을 석견이라 했는데, 효종 때 1659년의 실록 기사에는 이름이 이회(李檜)로 나타난다. 1659년 윤 3월 4일에 경안군에 봉해졌고, 승헌대부에 이르렀다. 온천에 다녀오던 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차남 임성군은 소현세자의 장남인 경선군의 뒤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어 임창군의 차남 밀남군(密南君) 감(堪)이 뒤를 이었다. 임창군의 장남 밀풍군(密豊君) 탄(坦)은 이인좌의 난 때 임금으로 추대되어 난이 진압된 후 자결하였다.

최종 관직은 승헌대부 경안군이었다. 두 아들을 두었으나 둘째 아들 엽이 태어나던 그해에 사망한다. 1665년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이 나서, 그해 9월 18일 실려서 돌아온 뒤 9월 22일 갑자기 죽었다. 현종은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고, 의관(醫官) 박군(朴頵)은 그를 구호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잡아다가 신문한 뒤 형장을 가하고 정배시켰다.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 없어 현종이 배려하여 임시로 그의 자녀들에게 집을 지어주었다. 황해도 장연(長淵)에 그의 집안에게 땅을 둔전(屯田)으로 내려주었으나 후일 숙종 때 압수되었다.

사후[편집]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2리(碧蹄面 大慈2里, 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65-1번지에 안장되었다. 후에 1684년(숙종 10년) 분성군부인 김해 허씨가 죽자 그의 묘 옆에 합장되었다. 묘비와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1686년(숙종 12년) 5월 25일 증직으로  현록대부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다른 곳에 있던 아들 임창군 내외의 묘소가 1745년 그의 묘소 근처로 이장되었다.[위키백과에서]

조선의 왕족. 이름은 이혼(李焜)[2]소현세자 이왕와 민회빈 강씨의 손자로,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회(초명은 이석견)의 장남이다.2. 생애[편집]
1663년(현종 4년)에 태어났다.

임창군의 아버지 이석견(경안군)은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의 사후 할아버지 인조에 의해 4살 때부터 제주도에서 형인 이석철(경선군), 이석린(경완군)과 함께 유배 생활을 했다. 이석철과 이석린은 귀양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서 죽었는데 그 내막이 석연찮다. 자세한 내용은 경선군경안군 문서 참조.

다행히 이석견은 살아남았고 삼촌 효종이 즉위한 후 강화도로 옮겨갔다가 1656년(효종 7년)에야 귀양에서 풀려났다. 해배[3] 2년 뒤에는 복권받아 경안군(慶安君)으로 봉해졌고 품계가 정2품 승헌대부(承憲大夫)로 올랐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한 후유증 때문인지, 경안군은 1665년(현종 6년)에 22살의 나이로[A] 요절하고 말았다. 그 때 임창군은 불과 3살이었다.[A]

경안군 사후에도 임창군과 그의 형제들은 왕실에게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은 본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이 되지 못했던 소현세자계 자손에게 동정심을 가졌는지 상당히 잘해주었다.

그런데 '원래 왕이 되었어야했다'는 위치 때문에 항간에서는 임창군을 왕위에 올릴 것이란 유언비어가 돌았고, 임창군은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79년(숙종 5년) 3월에 결국 사건 하나가 터졌다. 강화도에서 흉서가 나돌았는데# 내용은 이러했다.[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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