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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4코스 행주나루길 (역도보)

사공(최명규) 2024. 3. 16. 22:20

많은사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사진영상으로 만들어 전, 후편을 부록으로 올림니다, 감사합니다.

평화누리길 4코스 행주나루길 

일산 호수공원 선인장 전시관 ~ 행주산성 입구 (11km / 3시간 소요)

총면적 103만 4000m2, 호수면적 30만m2가 조성되어 있다. 물과 나무 등 자연적 요소를 도입하여 도시인들이 접하기 힘든 자연생태계를 재현한 환경공원으로, 이상희 전 건설부장관의 착안과 최원만 (현 신화컨설팅 대표) 설계로 1996년 5월 4일 개장하였다.[2] 고양시의 새로운 명소가 되어 고양시민을 비롯한 인근 수도권 시민들의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호수와 어우러진 주변 경관과 호수를 이용한 다양한 레크리에이션 장소로도 이용된다.

일산신도시의 개발과 함께 근린공원으로 1995년 개장한 공원은 5km의 산책로와 자전거 전용도로가 감싸는 시민들의 체육공원이고 주말이면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어지는 문화의 공간에 하나이다.

세계 각국의 정원을 재현해 놓은 주제정원과 조각공원은 사람들이 가꾸어가는 예술의 장소가 되고 1년마다 개최되는 고양국제꽃박람회는 이곳을 세계적인 꽃의 고향으로 만들고 있다. 해질 무렵 호수의 낙조와 아름다운 조명으로 꾸며지는 밤의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가 높다. 호수 공원 북쪽의 노래하는 분수대는 주말의 밤을 장식하는 물과 빛의 음악 공연장이다. 단순히 높낮이를 달리하는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 선택한 음악의 고저장단을 물의 세기와 흐름으로 분석하는 복잡한 컴퓨터 작업을 통해 500여 가지의 미세하고 다양한 물의 변화를 표현하는 예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호숫가를 따라 7.5km의 산책로와 완만한 S자 코스 및 일직선 코스로 공원 내 일주 순환체제를 갖춘 4.7km의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되어 있다. 2만 1500여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세계꽃박람회기념전시관은 꽃박람회 기간에만 개방된다.[위키백과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은 임진왜란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백성들이 일본군과 싸워 크게 이긴 전투이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고, 진주대첩, 북관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육전 3대첩으로 불리며,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도 대첩과 함께 4대첩의 하나로 불린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치 전투와 독성산성 전투 등 전공을 세워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웅거하며 명군과 합세해서 한양을 탈환하려다 조명연합군이 벽제관에서 대패하여 평양으로 돌아감으로써 고립 상태에 빠졌다.

이때 권율은 이순신에게 여러 가지 무기를 제공받았다.

한편 일본군은 총퇴각을 하던 중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군을 대파하고 한양(현재의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행주치마

행주대첩이 일어났을 때, 행주산성에서 여성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진짜 있었던 일이 아닌, 민간어원설이다. 실제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언어학 이론인 화용론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행주치마를 민간어원설 곧 민담에 근거한 언어라고 판단한다. (조남호 외, 《언어와 의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임진왜란 이전에도 행주치마라는 용어가 존재[1]하였기 때문인데, 무려 행주대첩이 있기 76년 전이다.

행주치마의 어원은 행자쵸마에서 비롯되었다. 쵸마는 치마를 뜻하고, 행자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는데, 1.절에서 식사공양 등을 하는 행자승들이 걸치던 덮치마 라는 것이 하나이고, 2.닦는 헝겊이라는 의미의 '말포抹布'를 의미한다는 것이 또 다른 설. 그럼 반대로 행주치마에서 행주산성이 나온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낭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행주(幸州)라는 지명은 고려초기부터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동래성 전투에서 비슷하게 나온다.(정사 내용이다) 정확히는 여인 2명이 기왓장을 던져서 일본군과 싸우는 내용이다. 참고로 송공단에 있는 의녀비들이 바로 2 여인의 기리는 비이다.

여기서 영향을 받아서 나온 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된다.[위키백과에서]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승병장 처영의 병사들도 합세하여 총병력은 관군 3,000여명과 의병 6000여명 등 병력은 총 9,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행주산성의 지형은 후방에 한강이 흐르고 있었으므로 배수진의 형태였다. 또한 행주산성은 말이 좋아 산성이었지 높이가 120 m 밖에 안되는 낮은 언덕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였고 지대 역시 험준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행주산성은 그 규모가 작을 뿐만 아니라 성벽도 매우 낮은 토성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조선군은 토성 위를 목책으로 둘러싼채 싸움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열악한 조건속에서도 조선군은 휘하 다이묘들을 이끌고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일본군을 맞아 비격진천뢰 및 신기전 같은 최신 무기들과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 그리고 바위, 화살, 불덩이, 끓는 물까지도 퍼부어 7차례에 걸친 적의 총공격을 모두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최소 10,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타 히데이에 및 이시다 미쓰나리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혔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중상을 입고 죽을 위기에 몰렸으나 부하 병사들이 우키타 히데이에를 업고 뛰어서 도망친 덕택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이순신에게 제공받은 각종 함포들(천자총통 등)도 맹활약한 바 있다. 권율은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 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어 어마(御馬)까지 하사받았다.[위키백과에서]

편집을 마치며

한강변 철책길 초소들이 쉼터로 변했다, 전 구간은 이나지면 행주나루쪽으로 철조망이 철거된 부분에는 공원화가 많이 진행되있다, 갈대와 억새를 걷어내고 진디를 심어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지금도 그 곳을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보내고있다, 초소 쉼터에서 바라보며 부러움을 느낀다,행주나루 주변 공원도 너무 많이 변해 있어 낮선 곳에 온듯한 느낌이다, 지금도 변신 중이다,차량 출입에 요금을 징수할 준비도 하고 있다,

행주산성 토성을 돌아본 것은 처음이다, 선인들의 얼을 느끼며 가파른 토성길을 내려와 일정을 종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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