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쓰는 후기글
수어장대(守禦將臺)는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곽시설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위키백과에서]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서·남·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는 장대로 산성 내의 최고봉인 일장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의 양주·양평·용인·고양·서울·인천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전면에서 볼 때 크고 작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우고 내부에는 널마루를 설치하여 단조로운 난간을 둘렀다. 내부 천정에는 장반자를 귀틀 위에 깔아 단청으로 시문하였고 툇간 위의 반자는 연등천정이다. 내진과 외진 사이 바닥에는 전을 깔고 한쪽에 계단을 설치하여 2층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2층은 1층과 달리 변주에 판문을 달아 열고 닫을 수 있게 되어 있고, 바닥에는 마루가 깔려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수어장대의 목부에는 모로단청을 시문하여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ㅇ]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홍타이지가 칭제를 결심하고 조선에 보낸 사신은 인조와 접견을 못했고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은 홍타이지에게 배례를 하지 않았다. 조선이 친명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공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써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체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이병마저 탄약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써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기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위키백과에서]
편집을 마치며
이번에는 생소한 발걸음을 했다, "경기옛길 활용프로그램 인문학, 옛길에서 멘토를 만나다"(경기옛길과 함께하는 역사음악기행)
제목이긴데 오랬만에 학생이되에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남한산성 행궁에서 그 강좌와 그 속에 연결된 노래를 듣는다, 민경찬 명예교수(한국종합예술학교)님의 경기도 출신의 예술가가 만든 추억의 동요(오빠생각,고향의 봄,산바람 강바람 등)에 얽힌 이야기와 연결된 천주교의 박해와 세자의 볼모등 귀를 쫑곳 세우고 듣는다, 다리가 저려 몇번을 옮계 앉으면서도 현장에서 듣는 역사는 흥미로웠다,그리고 강촤에 나온 동요들을 2부에서 성악가의 목소리로 듣고 같이 부르며 강좌에 충실했는데 뜻밖에도 수 십년 잊고 지낸 어린시절이 노래속에서 되살아 나고 그 노래를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 했다,
간식을 먹고 전문 해설사님과 길을 나서 북문,서문, 수어장대,를 돌면서 자세한 해설을 듣는다,그리고 남문을거처 아침에 집결했든곳해설사의 집앞 으로 와서 일정을 종료하고 9번 뻐스를 마냥 가다렸다, 답답한 시간이 흐르고 뻐스가와 귀가길에 올랐다, 차음으로 느껴본 몸과 마음의 여유가 먾은 여운울 느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뭇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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