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소개
행주산성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 덕양산의 7, 8부 능선에 쌓은 테뫼식(山頂式) 성으로 흙을 이용한 토축산성입니다.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덕양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뻗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고 있는 형태는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같습니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북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토기와 회청색 경질토기 등의 조각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 수지문(手指文)이 새겨진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행주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 장군이 대승을 이룬 전적지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룬 곳입니다. 현재 성안에는 복원된 415m의 토성의 성곽과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으로 권율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 등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구축하였습니다. [행주산성 홈페지에서]
권율장군과 행주산성
왜군의 서진(西進)을 막은 권율은 1593년 음력 2월 12일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금천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휴정의 고제자인 승병장 처영(處英)의 의승병(義僧兵) 1천여 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의병장 김천일과 휴정의 승병장 처영의 의승병 1천여 명 병력을 합쳐 3,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였다. 그 뒤 권율은 정예병력을 소수 뽑아 도성에 보내어 일본군을 상대하게 하여 일본군의 주둔현황, 규모 등을 가늠하게 했다. 소수 조선군 병력을 보고 우키타는 본진(本陣)의 장수들까지 이끌고 3만의 병력으로 이들을 추격,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2월 12일 저녁, 우키타는 왜병은 7개 조로 나누어 사방에서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하기도 했다.
2월 12일 저녁 일본군이 행주산성 입구 주변에 세워둔 목책을 기습공격하자 소리를 듣고 바로 공격했다. 행주산성의 군민들은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 온 우키다 히데이에의 왜군을 맞아 바위, 화살, 불덩이를 붓고, 병사들은 물을 끓이게 하여 끓는 물을 퍼부어 500 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장 우키다 및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이시다 미쓰나리,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모두 부상을 입히고 격퇴하였다. 화살과 창이 다 떨어지고 자갈돌과 일부 식량까지 다 떨어지자 그는 부녀자들에게 돌멩이를 나르도록 지시했다. 전황이 악화되는 듯 하자 그는 상방검(尙方劔)을 들고 성루에 서서 여러 장수를 독려하였다. 이때 성내의 아녀자들이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덩이를 운.반한 것이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했다는 점으로 볼 때 이는 맞지 않다. 또한 이때 조선군의 신무기인 화차와 비격진천뢰도 맹활약한 바 있다.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흩어진 일본군은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행주산성을 불태우는데 실패하고, 도리어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는 헤아려 기록하지 못했다. 나머지 달아나는 일본군 130여 명의 목도 추가로 베었다. 행주대첩은 이순신의 옥포대첩,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4대첩의 하나로 꼽힌다.
이때 권율의 군대는 우키타 군이 버리고 간 화살, 칼, 갑옷, 포탄, 도창(刀槍), 화승총, 기치(旗幟) 등 많은 장비와 무기들을 획득했다.
권율은 왜병이 다시 올라올 것이라 보고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하여 주민들을 다른지역으로 피난시킨 뒤, 주둔군을 이끌고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 등과 연락하면서 파주성을 지키면서 주둔하였다. 그 뒤 일본과 명나라와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일시적으로 휴전하게 되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갔다. 그해 6월 권율은 행주대첩의 승전 공(功)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고, 원수(元帥)에 올랐다가 다시 도원수에 올랐으며, 영남으로 보내졌다. 영남에서 탈영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탄핵을 받고 해직되었다.[위키백과에서]
고양 행주산성(高陽 幸州山城)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의 덕양산에 있는 넓이 0.16km2 산성이다. 지정면적 361,171m2,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1]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대첩지로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개관
행주산성은 고양시의 서남쪽 끝 한강 연안에 덕양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7~8부 능선에 축조된 토성으로 둘레는 1km이다. 1593년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의 전적지이다.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산 정상부에 있으며, 1845년에 건립한 행주대첩 <중건비>가 행주서원 기공사 앞에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정상부 기념비는 1963년에 세운 것이다. 1970년에 행주산성 보수정화사업으로 대대적인 정비와 권율의 사당인 충장사(忠莊祠), 충의정, 덕양정, 진강정 등을 짓고 정문인 대첩문을 세웠다 [위키백과에서]
토종아바이 순대국집(내장탕 ; 1만원씩)
편집을 마치며
올해도 몇일 안 남은 년말이다, 행사등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고 한가한 시간인데 날씨마저 추워서 선 듯 나서질 못한다, 직장동료들과 가기로 약속한 12월 20일 행주산성 일정이 눈이온다는 예보로 취소가 되었다, 그래서 청파님과 통화해 눈이오든 그대로 가기로 하고 아침 10시, 부천 종합 운동장역에서 만나 능곡역에서 내린다, 오랜 기억을 더덤어 차량기지를 돌아 행주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구름이 걷히는 듯 파란하늘이 보이는 듯 하든 날씨는 일정이 끝날때 쯤 잔뜩 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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