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이며 전체 면적은 1,086,696.50m2이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치마바위·매바위·범바위·이슬바위·모자바위·선바위·지렁이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2] 산수화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가 유명하다. 동쪽에는 경복궁, 서쪽에는 무악재, 남쪽에는 서대문독립공원, 북쪽에는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있다.
일화
고려 시대의 강감찬요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강감찬 장군이 젊을적에 이 지역 판관으로 부임을 하였는데 인왕산과 북한산 일대에 호랑이가 많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강감찬은 노승으로 변신해있던 호랑이들의 대장을 알아보고 호통을 쳤으며 호랑이들은 도망을 갔다고 한다.
조선 시대의 필운대
조선 중기의 명신 필운 이항복이 살던 곳이다.
서울 북한산 묘소에 안장된 박태성
대략 숙종 치세 때의 박태성이라는 사람은 고양군에 묻힌 아버지의 산소를 찾아뵙고 난 뒤에 일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양군에 가려면 무악재를 넘어가야 하는데 어느날부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서 박태성을 태워줘 아버지의 산소까지 데려다주었고 집으로 돌아 올 때도 데려다주었다고한다. 호랑이는 40년간 박태성을 도왔고 박태성이 죽었을때는 산소 옆에서 같이 죽었다고 한다. 이에 박태성의 후손들은 호랑이를 박태성의 산소 옆에 묻어주었고 제사까지 함께 지내주었으며 묘소는 북한산에 위치해있다.[위키백과에서]
인왕산 수성동 계곡(仁王山 水聲洞 溪谷)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왕산에 있는 계곡이다. 2010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사유
옛 옥인아파트 일대는 조선 시대 수성동(水聲洞)으로, 조선 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당시의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므로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이 일대가 조선 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 무대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으며, 계곡 아래에 걸려 있는 돌다리는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통돌로 만든 제일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 매우 가치가 있다. 따라서 돌다리를 포함하여 남아 있는 계곡부 전체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옛 수성동의 수려했던 경관 자체를 보존하고자 한다.[위키백과에서]
조사 보고서
수성동은 누상동과 옥인동의 경계에 위치한 인왕산 아래 첫 계곡으로 조선 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수성동(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수성동의 ‘동(洞)’은 현재의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동’이 아니라 ‘골짜기’·‘계곡’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현재 철거된 종로구 옥인동 옥인아파트 자리에서 복원된 계곡이다. 계곡의 길이는 총 190.8m, 폭은 최대 26.2m, 최소 4.8m에 이르며 하류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가 1기 남아 있다.그 옛날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玉流洞)으로 나뉘어 흘렀는데, 이 물줄기가 기린교에서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옥같이 맑게 흐르던 “옥류동 계곡”은 콘크리트로 덮여 주택가로 변했지만, 수성동 계곡은 옥인아파트 철거 후 옛 모습을 되찾아 여전히 맑고 청아한 물소리가 들리고 있다.
수성동은 조선 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고,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고, 세종의 셋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집터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위키백과에서]
《한경지략》 - 명승(名勝) - 수성동(水聲洞)
水聲洞 在人王山麓 洞壑 幽邃 有泉石之勝 最好 暑月 遊賞 惑云此洞 匪懈堂(安平大君 瑢蹟也) 舊基也有橋名麒麟橋
“수성동은 인왕산 기슭에 있으니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여 시내와 암석의 빼어남이 있어 여름에 놀며 감상하기에 마땅하다. 혹은 이르기를 이곳이 비해당 터(안평대군 이용의 옛 집터)라 한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麒麟橋)라 한다.”
수성동 계곡 이곳저곳에는 조선시대 저명한 인물들과 그에 얽힌 유적들이 널리 분포하였는데, 이들의 이야기가 옛 시와 그림 속에 남아,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 살던 터전인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장동(壯洞) 일대를 8폭의 진경, 즉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으로 남겨 놓았는데 인왕산 일대 〈수성동〉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그림을 보면 거대한 바위 사이로 급한 개울이 흐르고 주변에는 암석이 수려하며, 계곡에는 장대석을 두 개 맞댄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있는데, 선비들은 한가로이 풍경을 즐기고 있다. 오늘날 인왕산 수성동 풍경의 원형이 18세기 겸재 정선의 회화 속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성동 계곡은 옥인아파트 조성 시 계곡의 암반부가 일부 복개도로로 변하는 등 경관이 일부 훼손되었으나, 조선시대 겸재 그림 속 인왕산과 계곡부의 전체적 풍경을 매우 양호하게 유지하고 있고 현재 훼손된 경관을 회복하기 위해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또한 이 일대는 조선후기 중인층을 중심으로 저명한 시사(詩社)가 결성되어 18~19세기 위항문학[2](委巷文學)을 꽃피웠던 곳으로 문학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시모임(詩社)은 당시 양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문학이 중인층을 비롯한 사회 저변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규장각 서리 출신으로 위항시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존재 박윤묵은 평민시인 천수경(千壽慶)·왕태(王太)·장혼(張混)·김낙서(金洛瑞) 등과 어울려 옥계시사(玉溪詩社)를 결성하고, 천수경의 송석원(松石園), 장혼의 이이엄(而已广) 등에 모여 함께 시회를 즐겼는데 이러한 사실을 자신의 문집 《존재집》(存齋集)에 자세하게 글로 남겼다.[위키백과에서]
박윤묵의 《존재집》(存齋集) 23권 - 遊水聲洞記
洞多水。以水聲名。迺西山之口也。庚午夏。大雨數十日。川渠漲溢。平地水深三尺。余朝起跣足着屐。衣雨衣携一壺酒。與數三同志者入洞。至石橋邊。上下一望。應接殆不能暇。溪澗之勝。泉瀑之壯。怳與舊日 觀大有異焉。凡西山之水。或橫流或倒流。或折而復流。或掛匹練。或噴亂珠。或飛於絶壁之上。或灑於松 翠之間。百谷千流。不一其狀。皆到水聲之洞然後。始成一大流。裂山倒壑。衝崖轉石。如万馬之爭騰。如疾雷之暴發。其勢不可遏也。其深不可測也。其中霏霏如也蕩蕩如也。時飛沫濺衣。凉意逼骨。魂淸神爽。情逸意蕩。浩然如與造物者。遊於物之外也。遂大醉樂極。散髮長歌。歌曰西山之上雨床床兮。西山之下水 湯湯兮。惟此水是吾鄕兮。徜徉不忍去。物與我而俱相忘兮。歌闋相顧而起。天忽開霽。西日已在山。
수성동(水聲洞)은 물이 많아 물소리라는 뜻의 수성으로 이름이 붙었는데 곧 인왕산 입구다. 경오년(1810) 여름 큰 비가 수십 일이나 내려 개울물이 불어 평지에도 물이 세 자 깊이나 되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 맨발로 나막신을 신고 우의를 입고서 술 한 병을 들고 몇 명의 동지들과 수성동으로 들어갔다. 돌다리 가에 이르니 아래 위쪽의 풍경을 바라보느라 다른 데 정신을 팔 겨를이 없었다. 개울이 빼어나고 폭포가 장대하여 예전에 보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대개 인왕산의 물은 옆으로 흐르기도 하고 거꾸로 흐르기도 하며 꺾어졌다 다시 흐르기도 한다. 벼랑에 명주 한 폭을 걸어놓은 듯한 곳도 있고 수많은 구슬을 뿜어내는 듯한 곳도 있다. 가파른 절벽 위에서 나는 듯 떨어지기도 하고 푸른 솔숲 사이를 씻어내듯 흐르기도 한다. 백 개의 골짜기와 천 개의 개울이 하나도 똑같은 형상을 한 곳이 없다. 이 모든 물이 수성동에 이르게 된 다음에야 하나의 큰 물길을 이룬다. 산을 찢을 듯, 골짜기를 뒤집을 듯, 벼랑을 치고 바위를 굴리면서 흐르니 마치 만 마리 말들이 다투어 뛰어오르는 듯하고 우레가 폭발하는 듯하다. 그 기세는 막을 수가 없고 그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며, 그 가운데는 눈비가 퍼붓는 듯, 자욱하고 넘실거린다. 때때로 날리는 포말이 옷을 적시면 서늘한 기운이 뼛속까지 들어와 혼이 맑아지고 정신이 시원해지며 마음이 편안하고 뜻이 통쾌해진다. 호탕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이 세상 바깥으로 노니는 듯하다. 마침내 술에 만취하여 즐거움이 극에 달하였다. 이에 갓을 벗어 머리를 풀어헤치고 길게 노래하노라.
인왕산 위에 비가 쏴하고 내리면인왕산 아래에 물이 콸콸 흐른다네.이 물이 있는 곳 바로 나의 고향이라머뭇머뭇 차마 떠나지 못한다네.내 풍경과 함께 때를 씻고 나서노래 부르고 돌아보면서 일어나니하늘은 홀연 맑게 개고해는 하마 서산에 걸렸네.
한편 계곡 하류에 걸려 있는 돌다리(길이 3. 8m, 폭 0.9m)는 장대석 2개를 잇대어 만들었는데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하고 도성(都城) 내에서 유일하게 원위치에 원형 보존된 다리이며, 또한 통돌로 만든 가장 긴 다리라는 점에서 교량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어 약 190.8m에 달하는 계곡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보존하기로 하였다.
이 돌다리는 현재까지 각자(刻字) 등이 발견되지 않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기린교"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한경지략》 등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에 실린 기록들과 겸재의 그림 등을 고려할 때 "기린교(麒麟橋)"로 추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왕산 수성동(水聲洞)은 조선 후기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 등에 명승지(名勝地)로 소개되고, 겸재 정선의 〈수성동〉 회화에도 등장하며, 조선 후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주무대로 당시의 풍경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전통적 경승지'로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옛 돌다리를 포함하여 남아 있는 계곡부 전체를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여 옛 수성동의 수려했던 경관 자체를 보존하고자 한다.[위키백과에서]
종로구 최초
한옥공공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은 종로구 16번째 도서관이자,
종로구 최초 한옥공공도서관으로 독서와 사색,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고
주민을 위한 다양한 독서·문화예술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 전통적인 분위기의 매력적인 공간 ”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지붕기와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수제기와를 사용하고,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기와 3천여 장을 재사용한 의미 있는 건축물입니다.
인근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등과 함께 문학 인프라의 중심으로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을 지원합니다.
“ 문학 특성화 도서관 ”
시·소설·수필 위주의 다양한 문학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주민들에게 각종 독서모임 장소와 창작활동이 가능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국내 문학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청운까치서당>, <아빠와 함께하는 1박 2일 독서캠프> 등 아이들을 위한 문화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휴식, 사색, 창작, 교육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각광받고 있습니다.[종로구 청운도서관 홈페지에서]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1] 왕들이 경복궁에 들어갈 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 왕래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도성에 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위키백과에서]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문학관이다. 종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폐기된 상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었다. 2012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재학하던 시절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1941년 5월 벗이자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하였다.[3] 후일 국문학자가 된 정병욱은 윤동주로부터 증정받은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를 보존하여 해방 후 출간하였으며누상동 하숙 시절을 추억하며 동주 시의 여러 명편들이 이곳에서 씌어졌음을 증언하였다. 종로구는 윤동주가 잠시 거처하였던 인연을 살려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선 곳은 원래 청운아파트를 위한 상수도 가압장이었다 청운아파트는 서울 도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 1969년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11동 557가구 규모로 지어졌다. 1995년부터 아파트의 구조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이 있었고, 재건축을 시도하였다가 포기하여 철거하기로 하였다.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는 청운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8] 청운아파트는 2005년 9월 완전 철거되었고 공원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청운공원 조성은 서울의 낙산공원을 비롯해 총 8개 지구 63개동의 아파트 철거 및 녹지 환원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으로, 이로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철거만 된 도봉시민아파트를 제외하곤 모두 공원화가 완료되었다.
청운공원의 조성 후에도 가압장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리모델링을 통해 윤동주문학관이 지어지게 되었다[위키백과에서]
편집을 마치며
길지않은 길이지만 길게 걸었다,그래서 사진이 너무 많이 찍혔다,너무 많은 지적을 받아 새해에는 중점적으로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행하지 못했다, 부끄럽게 생각하며 참 좋은 사람들과 보낸 느것한 오늘 하루 창의문 앞에서 일정을 종료한다
'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요산행 영상)인왕산 (0) | 2025.01.17 |
---|---|
(수요산행 1부)독립문역~하늘다리~인왕산 (0) | 2025.01.16 |
새해 첫 나들이 눈내리는 임진각(사진영상) (0) | 2025.01.07 |
새해 첫 나들이 눈내리는 임진각 (0) | 2025.01.07 |
축, 최정윤 졸업식(2025,01,03,) (0) | 2025.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