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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절 2 경복궁

사공(최명규) 2019. 10. 4. 19:30

개천절 2 경복궁

경복궁(景福宮)은 대한민국 서울 세종로에 있는 조선 왕조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1]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2]

 면적은 432,703m2이며, 동서 500m, 남북 700m 규모로 남아 있다.[3]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4][5]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

태조실록 6권 3년 9월 9일[6]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7]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8]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5][9]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勤政門 : 남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7][10]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11]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1]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8]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8]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8][12]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13]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7]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5]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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