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한양 도성길 1 (숭례문 ~ 광희문 ~ 동대문 ~ 혜화문) 파워샷

사공(최명규) 2023. 4. 1. 21:27

같은 길 다른느낌

2023년 3월 30일 동갑내기 친구 셋이서 한양도성길을 걷기로 약속된 날이다, 파워캠을 준비하는 바람에 일거리가 널었다카메라로 찍을때는 몰랐는데 파워캠의 화각에 반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나름대로 가까운 근접촬영이 안된다, 그래서 카메라도 필요하고 파워 캠도필요해 결과적으로 양손잡이가 된것이다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1]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2]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3][4] 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위키백과에서]

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위키백과에서]

https://tv.kakao.com/v/436925692사진영상

광희문(光熙門, 영어: Gwanghuimun[1])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간문 중 하나로 남동쪽에 위치했다. 이름의 '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2] 내수구인 청계천과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일제강점기 당시 시민들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3] 17세기에는 남소문(南小門)과 혼동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1456년에 건립되어 1469년 폐문되고 1913년에 철거된 남소문과는 무관하다.[위키백과에서]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5] 이때 흥인지문과 함께 목멱산과 타락산 사이에 건축되었고, 남소문동천과 개천(開川)인 청계천이 만나는 이간수문 남쪽에 위치하였다. 목조 문루는 단층에 전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꼴로 건축되었다. 일반 백성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왕이 광희문을 사용한 경우는 병자호란 때 왕이 가마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피란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록된 바가 없다.[6]

전란을 거치며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제외한 한양도성의 문루는 모두 소실되었다. 숙종과 영조는 소실된 문루를 다시 건축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문루가 세워진 것이 광희문이다. 숙종 37년인 1711년에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을 것을[改設]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광희문의 관리를 담당하던 금위영이 2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숭례문과 흥인지문처럼 중층으로 하지 않고 남한산성의 문을 선례로 단층으로 짓기로 계획했다.[7] 이로써 이듬해 4월 11일까지 육축 9칸을 다시 쌓아 문짝을 달았는데 홍예문으로 했다. 그러나 문루는 목재를 충분히 마련한 후에 재건하기로 하고 이때까지 마련한 목재는 돈의문의 재건에 사용하였다.[6][8] 1719년(숙종 45년) 1월 25일에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며,[9] 2월에는 편액을 새로 걸었다.[6] 단청은 영조 20년인 1744년에 칠했다.[위키백과에서]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