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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길 2 (숭례문 ~ 광희문 ~ 동대문 ~ 혜화문) 파워캠

사공(최명규) 2023. 4. 1. 22:01

같은길 다른느낌 (파워캠으로 찍은 사진임니다, 찍으면서 화각의 넓이를 실감합니다,)

https://tv.kakao.com/v/436927886

남산(南山)은 서울특별시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는 이다. 높이는 해발 270.85m로서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정상에는 N서울타워가 있으며, 그 부근까지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고 남산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위키백과에서]

광희문(光熙門, 영어: Gwanghuimun[1])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간문 중 하나로 남동쪽에 위치했다. 이름의 '광희'는 "빛이 멀리까지 사방을 밝힌다(光明遠熙)"라는 데에서 유래했다.[2] 내수구인 청계천과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고, 도성의 장례 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일제강점기 당시 시민들은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렀다.[3] 17세기에는 남소문(南小門)과 혼동되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1456년에 건립되어 1469년 폐문되고 1913년에 철거된 남소문과는 무관하다.[주해 1][4]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문루가 망가졌다가 1975년 문을 남쪽으로 옮겨 문루와 함께 복원했다.[위키백과에서]

역사 ; 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5] 이때 흥인지문과 함께 목멱산과 타락산 사이에 건축되었고, 남소문동천과 개천(開川)인 청계천이 만나는 이간수문 남쪽에 위치하였다. 목조 문루는 단층에 전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꼴로 건축되었다. 일반 백성들이 주로 이용했으며, 왕이 광희문을 사용한 경우는 병자호란 때 왕이 가마를 타고 남한산성으로 피란할 때를 제외하고는 기록된 바가 없다.[6]

전란을 거치며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제외한 한양도성의 문루는 모두 소실되었다. 숙종과 영조는 소실된 문루를 다시 건축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문루가 세워진 것이 광희문이다. 숙종 37년인 1711년에 민진후가 광희문을 고쳐 쌓을 것을[改設]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광희문의 관리를 담당하던 금위영이 2월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이때 숭례문과 흥인지문처럼 중층으로 하지 않고 남한산성의 문을 선례로 단층으로 짓기로 계획했다.[7] 이로써 이듬해 4월 11일까지 육축 9칸을 다시 쌓아 문짝을 달았는데 홍예문으로 했다. 그러나 문루는 목재를 충분히 마련한 후에 재건하기로 하고 이때까지 마련한 목재는 돈의문의 재건에 사용하였다.[6][8] 1719년(숙종 45년) 1월 25일에 민진후가 "국초(國初)에 도성을 쌓은 뒤 문루를 모두 세웠다"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며,[9] 2월에는 편액을 새로 걸었다.[6] 단청은 영조 20년인 1744년에 칠했다.[위키백과에서]

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2]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3]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4]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5]

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6]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7]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8]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특별히 지(之)자를 넣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흥인지문의 현판은 4대문 중 유일하게 4글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9]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10]

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11]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12]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13] 2015년에는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를 포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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