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한양 도성길 두번쩨 (혜화문~숙정문~창의문~광화문) 전편

사공(최명규) 2023. 4. 12. 08:46

2023년 4월 10일 

직장동료 동갑내기 세명이 한양도성길 두번쩨 혜화문에서 출발해 숙정문,백악산,창의문,광화문, 순으로 걸을 계획으로 길을 나섯다,거리는 약 10km 이지만 고도가 있어 걱정을 한다, 많이 걷는게 처음이라서 무리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강행하기로 하고, 숙정문을 지나 소나무가 울창한 성곽길을 걸으며 힘은 들지만 경치는 멋지다며 힘들어 하는 친구들을 독촉해서 백악산 정상에 올라 긴 휴식과 간식도 먹는다, 그리고 하산길, 좀 어렵다, 창의문을 지나고 칠궁 쯤 길가에서 다리에 쥐가나서 주저 앉았다, 한동안 휴식 하고 광화문으로 나와 광화문 광장을 통과하고 시청역에서 귀가길에 오른다,

https://tv.kakao.com/v/437204599사진영상

본래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발음이 같다 하여 혜화문으로 이름을 고쳤다.[주해 2] 1592년(선조 25년)에는 임진왜란으로 문루가 소실되었다. 1739년에는 경첩과 문짝이 소실되어 문을 닫지 못하는 까닭에 어영청 소속 병사들이 문을 지키도록 하였고, 1744년(영조 20년) 8월에는 문루를 다시 세우고 현판을 걸었다.[5] 현판의 글씨는 조명리가 썼다.[6] 이후 헌종철종고종의 때에 일부 부재를 수리하였으나 주요 부재에 대한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위키백과에서]

혜화문(惠化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소문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주해 1]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1592년 문루가 불타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4년 복원되었다[위키백과에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1]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숙정문을 폐쇄하였는데,[2] 그 대신 창의문과 혜화문이 북문의 기능을 분담하였다. 실제로 당시 한양도성의 문은 정문과 간문으로 구분했는데, 출직호군이 간문은 20명이고 정문은 30명이었다. 이 때 혜화문은 정문으로 분류되었고,[3] 1433년(세종 15년)에는 호군이 숙직을 시작하였다[위키백과에서]

숙정문(肅靖門)은 대조선국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북쪽의 대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근정전동쪽)에 있다.

숙정문은 음양오행상 水, 智를 상징하는 북대문으로서,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고 하고, 실제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기도 한 바, 다른 한양도성 문과는 달리 실질적인 성문의 기능은 하지 못하다 1413년 폐쇄되었다. 대신 숙정문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위치한 창의문(彰義門) 인근, 오늘날의 상명대학교 인접한 지역에 홍지문(弘智門)을 내어 그쪽을 통해 다니게 하고,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원칙적으로 위치상·명목상의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이나, 오행상·기능적인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으로 여기기도 한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숨진채 발견된 장소로도 유명하다.[위키백과에서]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1]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에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3]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4],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5] 숙정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6]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7]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8],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위키백과에서]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