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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길 두번쩨 (혜화문~숙정문~창의문~광화문) 후편

사공(최명규) 2023. 4. 12. 09:24

https://tv.kakao.com/v/437204771사진영상

1·21 사태(-事態)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북한 124부대 소속 무장군인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1]

1월 17일 밤 휴전선을 넘은 무장공비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서울 청운동 세검정 부근, 청와대 앞 500미터까지 진출하였다. 창의문 근처에서 있었던 경찰의 불시검문에 불응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고[2] 무장공비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잡기 위해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진 가운데 군대와 경찰이 합동 소탕작전을 벌여, 31명 중 29명이 사살되었고 1명은 북한으로 달아났고 1명이 붙잡혔고.[3]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2]

이 사건의 결과로 향토예비군육군3사관학교, 전투경찰대, 684부대가 창설되었다.[4]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는 교련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여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다.[5]

북한은 사건 관련성을 전면 부인하였으나 생포된 김신조는 방송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6][7]고 말해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8] 또한 중앙정보부는 복수를 위해 특수부대인 684부대를 창설하였으나 계획이 취소되며 무관심속에 부대원들을 방치하였는데, 그 결과 1971년에 '실미도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다.[위키백과에서]

북한 124부대

124부대는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의 게릴라전 특수부대인데, 대남 적화공작에서 적극적으로 유격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 1967년 4월에 창설되었다.[13] 일반 군부대에서 선발된 척후병·통신병·운전병등과 제283군부대 및 집단군 도보정찰소에서 엄선된 정예병 2,4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연산과 상원 일대의 8개 기지에 300명씩 분산되어 적배치상황이론, 지뢰 극복을 위한 정찰병 기본 동작, 지형학, 사격, 침투훈련 등을 받았다.

1968년 1월 2일 민족보위성으로부터 청와대·미대사관·육군본부·서울교도소·서빙고 간첩수용소 등을 일제히 습격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25명의 유격대원을 엄선하여 그 해 1월 5일부터 황해도 사리원으로 이동하여 습격훈련을 실시하였다. 1월 13일 기습목표가 최종적으로 청와대로 결정되었고 정찰국장 김정태가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내렸다. 남파 특공대 규모는 31명이었으며 전원 함경도 출신의 장교들로 구성되었다.[14]

무장 침투

남파 특공대는 국군의 복장으로 위장한 후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새벽에 개성을 출발해 1월 18일 새벽에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미2사단과 25사단의 전투지경선상의 철도망을 절단한후 침투하였고 얼어있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넜다.[7] 문산 부근의 파평산 앵무봉을 거쳐 구파발의 진관사, 삼각산의 승가사를 지난 이들은 21일 밤 9시 30분경에 청와대 인근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했다.[3]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한 후 도주하였다.

소탕작전

한국 정부는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군경을 출동시켜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도주한 무장공비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1월 31일까지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침투한 무장공비 31명 가운데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북한으로 돌아갔다.[15] 그 와중에 민간인을 포함해 30명이 사망하고 52명이 부상을 입었다.[16] 투항한 김신조에 대한 수사를 통해 이들 무장공비가 북한에서 남파되었다는 사실과 침투목적등이 자세히 밝혀졌다. [위키백과에서]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1] 왕들이 경복궁에들어갈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걸어다니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으나 인조가 일으킨 인조반정때 문을 여는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들어와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정도로 위험한 문이다(?) [위키백과에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3]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4]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5]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6]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7]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8][위키백과에서]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창의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9]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10]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은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에서 유래하였다.[출처 필요] 이 이름을 본따서 상명대학교에는 '자하관'이라는 강의동 건물이 있으며, 대학은 자하(紫霞)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한다.[위키백과에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면 사적 서울 육상궁 칠궁 내 시설물 보수정비공사 칠궁 배치도. (문화재청) 연호궁이 연우궁으로 잘못 기재되었다.

칠궁(七宮)은 대한민국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영조가, 후궁 출신인 모친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역대 왕 또는 왕으로 추존되는 이의 생모인 후궁의 묘를, 옮겨와 합사하게 된 것으로 원래는 1724년(영조 원년)에 지은 육상궁만 있던 터였으나 1908년(순종 2년)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7명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칠궁이 되었다. 칠궁 합사는 봉사된 법모와 아울러 사친, 즉 생모에 대한 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1]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냉천정(冷泉亭), 초가집으로 된 정자, 늘어진 소나무, 긴 돌로 짠 연못과 축대, 벽돌담 등이 있다. 현재 조선 정궁 경복궁의 뒷쪽에 자리잡고 있다.[위키백과에서]

칠궁을 구성하는 일곱 궁[편집]

육상궁 (毓祥宮)[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육상궁입니다.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저경궁 (儲慶宮)[편집]

조선 선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신궁이다. 인빈 김씨의 사우 인빈궁은 회현동 사현(私峴)에 있던 송현본궁(松峴本宮)에 이안되었다가 선조의 8남이자 인빈의 출생인 의창군 이광(珖)의 사대손인 여천군(驪川君) 증(璔)의 집으로 옮겨 졌다. 그러나 영조 19년(1743) 인빈 김씨의 의창군(義昌君)과 손자인 낙선군(樂善君)과 한 실에 동봉(同奉)하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까닭에 별도로 건립하하였다.[2]

이후 영조 31년(1764)에는 송현궁(松峴宮)에 다시 옮겨지며 저경궁(儲慶宮)으로 개칭하였다.[3] 고종 7년(1870)에 계동의 경우궁 별묘(景祐宮別廟)에 이치(移置)되었다가 융희(隆熙) 2년(1908) 7월 육상궁 경내로 다시 이봉하였다. 저경궁터는 1927년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세워진다.

대빈궁 (大嬪宮)[편집]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이다. 경종 2년(1722) 10월에 중부(中部) 경행방(慶幸坊)에 건립되었으며, 이 때 희빈 장씨도 옥산부대빈으로 추존되었다.[3][4][5] 고종 7년(1870) 정월에 육상궁에 합설되었다가 고종 24년(1887) 4월 기존 경행방의 궁에 환봉되었는데,[6] 융희 2년(1908) 7월에 다른 궁들과 마찬가지로 신위를 육상궁 내 현재의 위치로 이봉하였다. 대빈궁 터는 1913년에 경성측후소가 세워진다.

연호궁 (延祜宮)[편집]

 
연호궁 현판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신궁이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정조 즉위 후 진종을 추존하면서 경복궁 동쪽 터에 할머니의 사당을 지어 제사를 드리고 연호궁이라 불렀다.[7] 이 때 연호궁은 북부 순화방에 위치하여 육상궁의 수궁 내관 및 수복에 겸하였다.[3][4][8] 현재는 육상궁 건물에 숙빈 최씨와 함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고종 7년(1870) 정월에 육상궁에 합설되어있다가 융희(隆熙) 2년(1908) 7월 육상궁 경내에 완전히 자리잡는다.

선희궁 (宣禧宮)[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선희궁터입니다.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이다. 처음에는 의열의 익호를 추존받아 의열묘(義烈墓)로 불렸는데, 정조 12년(1788)에 선희(宣禧)라 개명하였다. 고종 7년(1870) 정월에 육상궁에 합설되어있다가 건양(建陽) 2년(1897)에 환봉되고, 융희(隆熙) 2년(1908) 7월에는 다시 육상궁 경내 경우궁을 합설하며 옮겨진다. 육상궁에 이봉하기 전 선희궁은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에 있었는데 구한 말 현신교동(現新橋洞) 일번지(一番地)로 맹아 학교터가 세워졌다가 1912년 고아원인 총독부 제생원 양육부가 세워진다.

선희궁터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고 건물이 일부 남아있다.

경우궁 (景祐宮)[편집]

조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궁이다. 처음에는 창덕궁 내 전각에 봉안하며 현사궁(顯思宮)이라 하다가, 순조 24년(1824)에 상의 기간이 끝남에 따라 별묘(別廟)를 세워 경우궁(景祐宮)이라 하고 이듬해 2월 신주를 봉안하였다. 경우궁은 북부 양덕방에 있는 용호궁(龍虎營) 터에 세워졌는데[3][5] 현재의 종로구 계동이며 강남으로 이전하기 전의 휘문고등학교 운동장자리이다. 2023년 현재 현 순이네 가게자리이다

갑신정변때 개화당이 고종 부부를 임시로 경우궁에 옮긴 적이 있는데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한 후인 고종 23년(1886) 봄에 경우궁 이어 공사를 시작한다. 융희(隆熙) 2년(1908) 7월 육상궁 경내에 합설하여 칠궁을 이룬다. 경우궁 터에는 1910년 경성부립 순화병원이 세워진다.

덕안궁 (德安宮)[편집]

 
덕안궁외경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신궁이다. 궁인이던 엄씨가 영친왕을 낳으면서 엄씨가 지낼 궁으로 경선궁을 세웠는데[9], 곧이어 덕안궁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1913년에 현(現) 태평로 1가 61번지에 새로이 궁을 건립하여 엄씨의 묘우로 정하고 명칭을 마찬가지로 덕안궁이라 하였다. 1929년 7월 11일에는 육상궁 경내에 합설하여 칠궁을 이룬다. 덕안궁이 있던 자리는 1935년 경성부민회관이 세워진다.[위키백과에서]

칠궁(七宮)정문

계획은 궁 내부를 관람하기로 되있는데 너무넞게 도착해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휴식하고 몸을 회복시켜 광화문 광장으로 해서 시청역에서 오늘 일정을 종료한다,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1]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주해 1]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는데 왼쪽 문은 무신이, 오른쪽 문은 문신이 출입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왼쪽 문에는 거북이가, 오른쪽 문에는 천마가 그려져 있다.[2] 경복궁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문 3개를 지나야 하는데, 그 중 첫째가 광화문이고 둘째는 흥례문, 셋째는 근정문이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 경복궁과 함께 지어졌다. 창건 후 정도전은 남쪽에 있어 '오문'(午門)이라 불리던 문의 이름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할 때 단(端)이 바르다(正)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문(南門)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여 남문이라는 이름도 사용된 것으로 본다. 이후 태종이 정문을 포함한 경복궁의 축을 중심으로 육조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조선의 주요 관청이 광화문을 중심으로 배열되었다.[4]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1425년(세종 8년)에 처음 지어졌다. 태종이 창덕궁을 짓고 거기에 이어해 집무를 본 까닭에 경복궁은 퇴락했고,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뜨자 경복궁으로 정궁을 옮겼는데 옮기며 여러 전각의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이름은 집현전 학사들이 지어 올린 것으로, 이 때 금천교와 여러 문의 이름도 함께 지었다.[5][6]

당시 광화문은 중층 문루로 지어졌으며, 누각 안에는 종과 북을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려 시간을 알렸다.[7] 1474년(성종 5년)에는 근정문, 홍례문(흥례문), 광화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검소한 덕이 아니라는 정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겸재 정선이 18세기에 그린 경복궁도. 아래 광화문의 석축 4개가 남아있다.

태조때 지은 광화문은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정궁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김에 따라 경복궁은 복원되지 않고 폐허로 남아있게 된다.[4] 다만 1747년(영조 23년)에 흥천사명 동종을 옮겨 광화문에 걸고,[9] 정조 통치기에는 종을 쳐 백성의 억울함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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