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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2023,11,19,)

사공(최명규) 2023. 11. 20. 19:11

경복궁(景福宮, 영어: Gyeongbokgung Palace)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에 위치한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흥례문근정문이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위키백과에서]

광화문(光化門)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조선왕조 법궁인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1]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 구조로 되어 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지나야 하는 문 3개 중에서 첫째로 마주하는 문이며, 둘째는 흥례문, 셋째는 근정문이다.

광화문 앞에는 지금은 도로 건설로 사라진 월대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는데, 왼쪽 문은 무신이, 오른쪽 문은 문신이 출입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왼쪽 문에는 거북이가, 오른쪽 문에는 천마가 그려져 있다.[2]

1392년 태조 시기에 경복궁과 함께 지어진 광화문은 조선의 주요 관청이 밀집한 육조거리의 기준점으로 자리잡았다. 1592년 선조 대에 이르러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의 소실과 함께 파괴되어 한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가,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으로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1926년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 조성 과정에서 총독부에 의해 철거가 계획되었으나, 각계의 반발에 부딪혀 경복궁 동쪽 건춘문 쪽으로 이전하였다. 해방 후 한국 전쟁으로 목조 부분이 소실되어 석축만 남아 있었다가, 1968년 중앙청 앞 원래 자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하였다. 이후 2006년부터 목조 복원을 통한 고종 대 모습으로의 회귀를 위해 기존 건물을 해체하였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 2023년 10월 16일에는 문앞 월대와 해태상, 그리고 현판의 복원이 완료되었다.

광화문은 오늘날 서울를 넘어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표 건축물로 남아 있다.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경제성장을 거치며 세종로라는 최대 규모의 도로가 건설되어 중대한 교통로로 기능하였으며, 이후 광화문광장이 조성되어 서울 도심 속 대표 집회·휴식 공간으로 자리잡았다.[위키백과에서]

월대 (月臺) 

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

[한국만족 대 문화백과에서]

궁  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

월대가 복원되고 처음으로 방문한 경복궁, 광화문앞 월대부터 차분하게 둘러본다, 일요일이라 한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도로로 차가 달릴때는 이런 여유가 없었다, 산듯하게 단장된 월대 위에서 역사의 소중함을 느껴본다,

근정전(勤政殿)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으로, 다포계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1395년 조선 태조가 조선의 정궁으로 경복궁을 조성할 때, 중추를 이루는 건물로 중건되었다. 임진왜란 시기 경복궁 전반이 불에 타면서 같이 소실되었다가 1868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공사 때 다시 세워졌다.[1]

조선 국왕의 정무와 나라의 큰 행사, 즉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는 등 국가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로 사용되었다.[2] 그 중에서도 국왕의 즉위식은 근정전의 주요 기능 중 하나였으며, 정종세종세조성종중종명종선조가 근정전에서 즉위를 치렀다. 이와 더불어 과거 시험의 거행과 합격 발표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3]

근정전(勤政殿)은 경복궁(景福宮)의 정전(正殿)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고, 내부관람도 실시하고 있다. 야간개장 때는 근정전의 내부를 공개했으나, 어좌를 제외한 모든 근정전의 내부는 불을 키지 않아 어둡게 보인다.[위키백과에서]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위키백과에서]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누각건물에서 많이 보이는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경회루는 성종 때 고쳐지으면서 누각의 돌기둥을 화려하게 용의 문양을 조각하였다고 전해지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고종대에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의 높이를 3단으로 각각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경복궁 경회루는 우리 나라에서 단일 평면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누각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소중한 건축 문화재이다.[현지 안내문에서]

경회루 옆에 향원전을 거억하고 있었는데 찿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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