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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창덕궁(2023,11,19,)

사공(최명규) 2023. 11. 20. 20:13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이기도 하다.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여기서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되었다. 한때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한다. 이로당 뒷편에 있던 고종이 소년 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老松)은 현재는 사라지고, 그를 추양하는 경송비만이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교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 제257호로 지정하였다.[위키백과에서]

창덕궁(昌德宮)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2]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3]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4]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 《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위키백과에서]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임진왜란후 경복궁 근정전 대신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창경궁 명정전과 이궁역할, 동궁으로 사용되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5호로 지정되었다.[위키백과에서]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고, 정문 인정문도 중층이었으며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이 있는 등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고쳐지으면서 정면 칸을 5칸으로 늘렸다. 1505년(연산군 11년)부터 인정전과 선정전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4],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공사는 중지되었다.

조선 전기 내내 저 모습을 유지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했다. 이후 고종 초기까지 약 270년 간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 근정전을 대신해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법궁 법전)으로 궁궐을 상징했다. 일례로 민요 《농부가》를 보면 '인정전 달 밝은 밤 세종대왕 놀음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세종대왕 임금의 대명사로, 인정전은 궁궐을 대표하는 건물로 언급한 것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의 화마도 비껴갔으나 1803년(순조 3년)에 화재로 불탔고 다음 해 다시 지은 뒤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인 1926년까지 살면서 인정전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 1994년에 원래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위키백과에서]

후원까지 관람 하려 했지만 입장이 종료되었다, 여기는 경로우대 불가, 입장료 5,000원

편집을 마치며

셋이서 경복궁역에서 만나 5번 출구로 나간다, 그리고 광화문 월대부터 둘러본다, 차도로 있을때는 인도가 좁아 옹색하게 다녔든 곳이다,궁사기 시작되었을떼 덜어난 철길 ? 일제의 잔재가 서울 한 복판 광화문앞 땅속에 있었다니,? 그리고 복원이 마무리되고 월대위에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다, 해태가 제 자리인지는 몰라도 자연스럽지 못한것 갔지만 해태옆에서 광화문을 올려다 보며 차소리. 사람소리, 들어며 한페이지 역사의 기록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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