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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12코스 통일이음길 일부구간 (전편) 백마고지와 두루미

사공(최명규) 2024. 1. 15. 18:26

평화누리길 12코스 통일이음길 일부구간 (전편) 백마고지와 두루미

연천역

연천역(Yeoncheon station, 漣川驛)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리에 위치한 경원선 철도역이다. 이 역부터 회기역까지 지상 구간이고 한국철도공사 구간이다. 심야에 1편성이 주박한다.

역 구내에 있는 급수탑은 과거 증기 기관차가 다닐 때 쓰이던 시설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급수정(給水井)에는 한국 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연천역은 위도상 38선 이북에 있기 때문에 6.25 전쟁의 발발 이전에는 소련 군정을 거쳐 북한 소속이었다. 승강장 서쪽에는 6.25 전쟁과 관련된 군용 물자를 남쪽으로 수송하기 위해 1948년에 설치된 화물용 승강장이 남아 있고, 현재도 군용 화물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1년 7월 한국 중부 집중호우로 인해 2011년 7월 28일부터 2012년 3월 21일까지 8개월 동안 영업이 중단된 바 있다.

2018년 7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연천 ~ 백마고지간 선로 개량 공사로 인하여 임시 종착역이 되었다.

2023년 12월 16일에 수도권 전철 1호선 동두천 ~ 연천 연장 구간이 개통되면서 전철역이 되었다. 이 역에서는 인천방면 전동열차만 운행하고, 중간 타절역은 광운대역과 구로역이다. 현재 경원선 통근열차와 평화열차 운행 중단으로 인해 대한민국 여객취급역 중 최북단 역이 되었다.[위키백과에서]

 

급수탑

 이 부분의 본문은 연천역 급수탑입니다.

이 시설물은 경원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급수탑으로, 현재 상자형과 원통형 2기가 남아 있다. 상자형 급수탑은 콘크리트조로 기단, 벽체부, 지붕부 3단으로 입면을 형성하였으며, 아치형 출입구를 두었고, 외관에 줄눈을 그려 조적조인 것처럼 구성하였다. 원통형 급수탑에는 급수관 3개와 기계장치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고, 탑 외부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195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여 제 기능을 다하고 사라졌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증기기관차 관련 철도 시설물로 가치가 높다.

연천역에서 백마고지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뻐스는 오늘이 마지막 운행일이 였다, 알고 간 것은 아니지만 한시간마다 연천역앞에 도착하는데 시간은 정확하지않은 듯 올시간이 훨씬 지나서 그나마 타고 백마고지역까지 직행했다,목적지 역에내리니 예정됬든 눈이오기시작했고 백마고지에 도착 했을 때는 함박눈으로 내리기 시작한다,

백마고지역

2012년 11월 20일에 개통되었고 1면 1선의 단선 승강장이다. 동두천발 통근열차 중 절반 정도만 이 역까지 운행했는데, 2014년 4월을 기점으로 통근열차 전부가 이 곳을 종점으로 한다.

한국에서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최북단의 철도역이며, 강원도 최서단에 위치한 철도역이다. 백마고지역보다 위도상 더 북쪽에 동해북부선 제진역도 있기는 하지만, 여기는 민통선 북쪽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선로가 북한으로만 이어져 있어 여객 영업도 하지 않는다.

현재는 밧줄로 완전히 막아놓아 승강장은 출입이 불가하나, 2023년 12월 기준 역사 내부에까지는 들어갈 수 있으며 화장실과 자판기를 이용할 수 있다.[나무위키에서]

 

분단 이전의 철원역을 대신하는 역. 철원역은 외촌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경원선이 지나가고 이 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하였다.

원래 철원역이 위치한 곳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춘천시와 맞먹을 정도로 번성했던 구철원 시가지라서 기본적인 수요가 큰 데다가, 이 역에서 금강산선이 분기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철도 시설 외에도 금강산선 조차장, 사무실, 전기시설, 여관 등이 밀집하여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서울역과 비교 대상이 될 정도로 경원선에서 손꼽히는 역 중 하나였다. 사실상 강원도 북부의 철도 교통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인해 철원역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사실상 완전히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전쟁 때문에 승강장은 없어지고 급수탑은 폭파되었으며, 선로도 대부분 흔적만 남고 사라졌다. 물론 철원시가지도 흔적만 남고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서 철원시가지는 할 수 없이 동송읍 시가지 바로 위쪽 화지리로 이사했다. 철원읍 시가지와 동송읍 시가지가 완전히 붙어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 따라서 지금 남아있는 시설은 대부분 관광 목적으로 전후에 재건한 것이며[6], 직접 가보면 공허할 정도로 매우 빈약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철원군 지역을 중심으로 백마고지 전투와 같은 대격전이 장기간 펼쳐졌기 때문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팻말의 유래 역시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로 경원선 선로가 대광리에서 끊어져 버려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다. 이후 경원선이 신탄리까지 연장복원되긴 했지만 원 종착역인 원산으로는 여전히 갈 수 없다.

2000년대 경원선 복원 논의가 되면서 처음에는 이곳을 지나 구철원까지 이어지는 형태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철원역의 원래 위치인 외촌리 지역이 현재 민통선 이북이며 군사적인 문제로 인하여 2007년 초 대마리(즉 현재의 백마고지역 부근)까지로 축소되었다.[나무위키에서]

백마고지 전투교전국지휘관병력피해 규모

한국 전쟁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6.25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백마고지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중국인민지원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의 지형과 전투 전 9사단 30연대의 방어선 구축

52년 10월 6일 새벽 395(백마)고지와 281(화살머리)고지 일대에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된 뒤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해가며 가며 파상 공세를 지속했지만 395고지의 9사단 30연대는 쉽게 내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395고지 능선은 y자를 왼쪽으로 기울인 형상이었는데, 북서쪽 방면이 얕긴 하지만 > 모양이라 이 방면으로 들어오는 중공군들은 양쪽 능선에서 십자포화를 맞고 수없이 피를 흘렸고, 결국 반듯한 북동쪽으로 반복공격을 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어쨌든 전체적으로 백마고지는 남쪽에서 방어하기가 정말 어려운 지형이고, 9사단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 9사단장인 김종오는 방어병력이 나가떨어지기 전 빠르게 대대~연대 단위로 밀어내기식 교대를 해가며 고지를 고수했고, 빠른 교대를 위해 (연대본부, 연대장을 거치지 않고) 휘하 대대에 직접 명령을 내려 이동시키는 월권을 행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이 덕에 백마고지 일대의 9사단 병력은 전투력이 완전 소진되지 않은 채 서로 교대해 가며 손실분을 보충할 수 있었다.

한편 9사단 예하 포병뿐만이 아니라 인근 미군의 포병부대가 총동원되어 지원에 나섰고, 미 공군의 지원까지 계속되었다. 거기다 백마고지의 동쪽 평야지대에는 한국군 53전차중대가 배치되었고, 이들은 전투 내내 중공군의 측면에 정확한 직사포를 퍼부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중공군은 395고지 정상을 수차례 피탈하는 데 성공했지만, 방어하던 한국군을 395고지 일대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고지가 뺏긴 와중에도 한국군은 능선 일대에서 재차 반격해 탈환했다가 중공군의 반격으로 다시 빼앗기는 등 이 고지를 손에 넣고자 열흘 동안 국군과 중공군의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 반복되었다.

이렇게 전투가 계속된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그렇게 계속되던 고지점령전에서 9사단은 휘하 병력을 총동원해 반격, 중공군이 공격의 교두보로 삼았던 백마고지의 북쪽 능선을 또다시 탈환해 중공군 전체를 백마고지 일대에서 격퇴함으로써 비로소 끝이 났다.{위키백과에서}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상자 숫자는 중공군이 1만 4천여 명, 한국군이 3,396명이었다.

현리 전투를 비롯해 그동안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번번이 실망스러운 졸전을 거듭했던 한국군은 1951년 후반부터 부대 전체의 재교육 등 내실을 다지기 위해 힘썼는데, 백마고지 전투에서 사단 단위 병력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 이후 9사단 병력들은 고지 동쪽 2사단이 있는 저격능선 전선으로 이동했고, 2사단은 11월 24일에 임무교대한 뒤 백마고지로 이동했다. 이후 백마고지는 일대는 아군의 확고한 영역이 되었고 MDL 이남에 위치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이 옛 북한령 연천군(련천군), 철원군의 영유권(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나무위키에서]

배경[편집]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편집]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이 395고지로 맹렬히 돌격했고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와 3차례나 전투를 치렀으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395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위키백과에서]

두루미를 보는 장소다, 멀리 보이는 들판에 수 많은 두루미가 보이고 그들의 대화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야 했는데, 너무 조용하다, 오늘 집을나서면서 설경을 찍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고 두루미를 여유있게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겄다는 마음으로 설래 든 마음이 너무 조용한 풍경앞에서 모두 물거품이 됬다, 다행히도 눈이 생각보다 많이내려 위안을 삼고 되돌아 나오는데 데극기가 진열된 길입구에 뻐스에서 많을 사람이 쏫아저 나오며 길을 올라온다,뜻박에 연출된 풍경, 그들은 눈을 뭉체 서로에게 든지며 축제를 하 듯 함성과 함께 춤을 춘다, 청파님과 둘이 말없이 그 순간들을 기록한다, 누군지는 모른다, 단지 지금 이 눈오는 풍경과 여기가 백마고지라는 것 때문에 감격하고 그것이 몸짖으로 연출되는 듯 하다, 남녀 노소의 구분은 무의미한 순간이다,등달아 즐거워 하다, 그들은 스처 올라가고 우리는 다음목적지로 이동한다,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제5공군의 F-86 세이버 전투기

이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었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제38군은 사실상 전투력을 상실해 재정비에 착수했고 제9보병사단도 혹심한 손실을 입어 재편성이 필요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 9954발, 중공군은 5만 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도 강승우 중위, 안영권 하사, 오규봉 하사, 김경진 소령, 이성덕(1929년 1월~1952년 10월) 소위, 김광수 대위 등 많은 인물들도 전사하였다 .

전투 기간 동안 미 공군이 주간 669회, 야간 76회의 출격 기록을 세우며 중공군을 폭격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제5공군은 745회 출격했다. 네이팜탄 358발을 포함해 폭탄 2700발을 백마고지에 투하했다. 중공군 제38군은 3개 보병사단 9개 연대 중 7개 연대에 걸쳐 1만 명을 잃게되었다. 특히 이번 전투에서 잃은 군대가 정예병이라 차후 신병이 보충되더라도 숙련을 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위키백과에서]

 

주요 생태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지역인 북만주, 삼강평야(아무르강 합수부), 한카호, 일본의 홋카이도 동부 쿠시로습지 등에서 번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부일처제의 번식체제를 유지한다. 산란수는 2개이며, 암수가 어린새를 이듬해 4~5월까지 보살핀다(물론 3월에 독립시키는 경우도 있음). 여타 겨울철에 도래하는 조류와는 달리 번식기에 형성되는 가족군을 유지하는 독특한 조류이다(유 등, 2008). 가족군이 아닌 경우(2~4, 5년생 미성숙새)10여 개체의 무리를 짓거나 먹이를 공급하는 지역의 경우 100여 개체 이상의 집단을 이루어 생활한다(첨부된 8번째 사진참조). 두루미는 굉장히 사회적인 동물로, 나이든 개체가 어린 개체에게 이동 최단거리를 알려주어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하게 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먹이 및 습성

한국에서의 겨울철 먹이는 주로 추수하다가 남은 쌀, 율무, 콩 등의 낙곡, 개천의 저서무척추동물(패류, 갑각류 등), 미꾸라지, 어류, 양서류, 옥수수 등을 먹는 잡식성이다. 강화 및 새만금지역 등의 갯벌에서 월동하는 두루미는 망둥어, 칠게 등이 주요 먹이원이다. 재두루미에 비해서는 육식성 먹이를 선호한다. 번식지에서는 습지에서 이용가능한 어류, 패류, 무척추동물(주로 우렁), 양서파충류, 소형포유류 등의 다양한 동물을 먹이로 한다. 인간을 제외하면 다 큰 성체는 검독수리 외에는 천적이 없으며, 검독수리의 습격도 드물다. 그러나 약하거나 어린 개체는 삵이나 여우등의 먹이가 된다. 천적이 거의 없지만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얕은 물에서 잠을 잔다. 물은 열손실이 적고, 다가오는 잠재적 포식자(인간 등)를 물소리로 알아챌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겉으로는 쉽게 암수구분을 할 수 없지만, 방해요인에 대한 방어행동 다른 두루미나 재두루미에 대한 배타적 행동이 수컷에 나타나며, 번식기의 수컷은 화려한 춤으로 구애를 한다. 합창이라 해석되는 Unison call을 할 때 "뚜뚜루룩"하는 소리를 내는데, 먼저 소리를 내는 쪽이 수컷이며 반박자 후 따라서 약간 낮은 음색으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암컷이다. 단정학이라고 부르는 두루미, 회학이라 불리는 재두루미 등이 두루미류에 속한다.

철원군 도래 두루미

매년 10월 말에서 3월 중순까지 한국에 도래하며 강원특별자치도(철원군이 가장 큰 월동지이며, 경기도(파주시연천군), 인천광역시(강화군)에 일부 도래하며, 강원특별자치도(고성), 전라북도(김제시)의 만경강하구(새만금 갯벌) 등이 소규모 도래지이다. 1982년 이후부터 발행된 대한민국의 500원 동전 앞면에는 날고 있는 두루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과거 기록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백천, 옹진, 연안과 서산, 당진, 예산, 청주, 진천, 음성, 진도, 강진, 해남, 완도, 장흥, 고흥 등 내륙과 해안지역에 두루 분포하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에 인천, 김포, 임진각, 대성동, 연천, 철원, 양양 등의 지역에서 관찰 되었으며, 최근에는 강화도와 대성동, 연천, 철원 지역에 국한되어 서식한다. 현재 철원분지 지역이 가장 많은 두루미가 월동을 하며, 2008년 기준으로 약 700여 개체의 두루미가 철원 지역에서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경기도 연천 약 120개체(2008년), 파주 대성동의 개체군은 규모가 불확실하며, 강화도의 월동지에는 10개체 정도의 소수만이 도래한다. 그외 강원도 고성은 최근 관찰 기록이 없으며, 부산시 낙동강 하구 등에서 각 1회의 관찰기록이 있지만 지속적인 월동기록은 아니었다. 전북 김제의 경우 2005년 3월 김제 조류보호협회 회원에 의하여 2년생 암컷 미성숙새가 구조되어 2007년 기준으로 철원군 한국조류보호협회 야생조수류 구조센터에서 보호받고 있다(2020년 현재 방사상태). 환경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전국겨울철새 동시센서스에 의하면 군산과 김제의 해안지역(새만금)에서 해마다 한쌍 정도가 월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위키백과에서]

두루미와의 다시만남

눈이 쏫아지고있다,백마고지로향하는데 옆 들판 멀러 두루미 한쌍이 먹는데 정신없다, 그래서 백마고지 뒤 철새 도래지에서는 많이 있을 것 이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 곳에는 한마리도 없었고 실망하고 백마고지를 돌아 나오는데 그 때까지 두루미가 그대로 있다, 그래서 실망했든 마음을 달래며 한참을 관찰 한다

감사합니다 후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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