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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강화길 제2길 ; 금릉옛길

사공(최명규) 2024. 5. 11.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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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0일 금요일 골드라인 풍무역에서 내려 새장타공원 출발선에선다, 날씨 맑음 걷기 최적의 날씨다 친구와 셋이서 출발한다, 김포장능~김포향교~걸포중앙공원~김포 아트빌리지~운양역 총거리 12km/3시간 20분,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길이막혀 돌아가다 경로에서 이탈하는 상황이 생겼고 많이돌아 합류를 두번이아 하고나니 2km이상을 추가했다,

제2길금릉옛길(풍무역(새장터공원) ~ 운양역(4번 출구))

김포의 원류를 찾아가는 길김포의 지명은 고구려 장수왕(475년)때 ‘신성한 포구마을’이라는 의미로 검포 (黔浦)라고 불렸습니다. 이후 통일신라 경덕왕은 757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흔히 사용하지 않고 어려운 한자인 ‘검(黔)’보다 일반적이고 좋은 의미의 한자인 ‘금(金)’이 쓰이면서 지금의 김포(金浦)가 되었습니다. 다른 지명으로 금릉(金陵) 으로도 불리기도 하였는데, 금릉은 김포의 대표 문화유산인 김포장릉과 김포의 500년 중심지였던 관아가 있었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금릉옛길은 김포장릉과 김포향교의 옛스러움을 기억하며, 현재 김포의 변화된 모습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소요시간3시간 20분(12km)
  • 풍무역
    (2번 출입구, 새장터공원)
  • 김포장릉
  • 김포향교
  • 걸포중앙공원
  • 김포아트빌리지
    (모담공원)
  • 운양역
스탬프
  • 김포장릉 입구(주차장) / 김포아트빌리지[경기옛길 홈페지에서]

현장 해설사 님인데 한장찍자고 했더니 포즈를 취해 주셨다,그리고 유치원 아이들한테 사후세계를 설명 해야하는 고충을 털어 놓았다, 그 아이들이 기억해 줄까도 걱정을 하신다, 절제된 설명이 모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긍지를 가지고 근무하신다고 덧붓이가도 하셨다

가는날이 장난이다, 향교에는 일년에 봄,가을로 제사를 모시는데, 김포향교는 5월 11일과 10월 30일인데 오늘은 전날로 그 준비를 하는 날이라고 그릇을 닦고 정리를 하는지 많이 널어 놓았다, 촬영을 허락받고 열려 있는 대성전 내부를 디려다 본다, 평시에는 볼 수 없는 제기들이 수도없이 많이 진열되 있고 그 것을 관리하는 분들과 많은 대화도 나누었다,

김포향교(金浦鄕校)는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향교이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김포향교는 고려 인종5년(1127)에 처음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1960년대 이래 여러차례에 걸쳐 보수하였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을 배치하였다. 그 외에 재실(齋室)과 출입구 구실을 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부리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화려한 팔작지붕을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만 갖춘 조선 후기 작은 규모의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위키백과에서]

천주교 인천교구 김포성당 경기도 김포시 북변동에 있는 성당이다. 성당 건물이 2013년 4월 18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42호로 지정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김포 통진 강화 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 당시는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몇 명의 순교자가 있었다.[2]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채결된 뒤 조선은 천주교를 허용하였다. 이후 전국에 천주교의 교구가 설치되고 성당이 자리잡게 되었다.[3] 김포지역은 1900년 서울시 중림동의 약현성당 전교회장 유공현이 선교를 시작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게 되었고[4], 1909년 행주성당 산하의 걸포리 공소가 되었다.

1946년 걸포리 공소[* 1]에서 걸포리 성당으로 승격되었지만[5] 건물은 여전히 12칸의 초가집이었다.[6] 1949년 김포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재관을 짓는 등 성당 건축을 진행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중단되었다.[5]

전쟁 중이던 1952년 김피득 신부가 현재의 부지를 마련하고 전쟁 후 건축을 하고자 하였으나 1954년 건강 악화로 선종하였고[5], 1955년 새로 부임한 신원식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1956년 완공하였다.[2]

성당의 건축 자재는 신도들이 지역의 석재를 직접 캐어 날라 마련하였다. 인근 해병대에서도 중장비를 지원하였다. 김포 성당은 40여 년 동안 미사를 올리는 본당의 구실을 하다가 1999년 바로 옆에 신축 성당이 세워지면서 교리실, 피정소 등으로 사용되었다.[7]

1961년 천주교 인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교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로서 김포성당은 답동성당과 소사성당에 이은 인천교구의 세번째 성당이 되었다.[5] 2006년 유리화 작가 조완희가 스테인드 글라스를 제작하였다.[8]

2013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542호로 지정되면서 건축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보존되고 있다[위키백과에서]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김포아트빌리지

1980년대 초, 서울 북촌과 을지로가 재개발되면서 도시의 한옥을 이축한 것이 김포의 샘재 한옥마을입니다. 재탄생의 이미지를 가진 이 마을은 2004년 김포 한강신도시 지구에 편입되면서 다시 한 번 해체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하지만 기존 자원의 리모델링을 통한 문화자산의 활용이라는 전망을 가지고 새로운 문화관광복합공간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김포시 운양동 모담산 자락에 안겨있는 김포아트빌리지는 모담산이 주는 소담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자연친화적 문화·예술 공간으로, 17개의 한옥과 5개의 창작스튜디오, 아트센터와 야외공연장, 전통놀이마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전통적 아름다움과 아트센터의 현대적 아름다움이 공존하며 시민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문화와 예술을 항상 접할 수 있는 친근한 공간으로, 타 지역의 관광객들에게는 다시 찾고 싶은 즐거운 공간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다양한 콘텐츠를 선보일 예정입니다.[김포 문화재단 홈페지에서]

편집을 마치며

걷는도중 김포 아트빌리지에서 현복이가 허벅지에 쥐가나서 쉬에가기로 했다, 오는동안에도 틈만나면 않아 쉬곤 하드니 함드는 모양이다, 그기다 경로이탈로 예정보다 많이 걸어서 더 그런가 보다, 남은 구간 모담공원은 산을 넘어가는 계단길이라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쉬는 동안 회복이 되었는지 아까시아꽃이 떨어저 꽃길 같은 계단을 차근차근 오른다,시간이 많이 지체 되었지만 쥐나는 것을 걱정하며 운양역에 무사히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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