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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관곡지(官谷池)사진 전편

사공(최명규) 2024. 7. 3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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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쓰는 후기글

무더위가 절정인 7월 30일 여러사정으로 만나지 못했든 분들이 뜻밖에도 참석을해서 인원이 9명 이나됬다, 바쁜사정, 겅강상,등 오랬동안 못 만난 안부를 주고받기에 바쁘다, 그렇게 관곡지에 도착했는데 연꽃은 절정이 아닌 듯 하다,다행이도 구름이 가끔씩 했볕을 가려준다, 수련등 앙증맞은 꽃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바쁘게 돌아본다.

관곡지(官谷池)는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연못이다. 1986년 3월 3일 시흥시의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관곡지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이다. 이 연못은 조선 전기의 농학자인 강희맹이 세조 9년 명나라에 다녀와 중국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씨를 심어 재배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안산군의 별호를 1466년 세조 12년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의 집 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 소유가 되어 관리 되어오고 있으며, 현재 시흥관내의 연성초등학교, 연성중학교 등 교명과 연성동의 동명 및 시흥시의 문화제 명칭인 《연성문화제》라는 이름은 이 못에서 유례되었다.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은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한 담홍색을 지니고 있는게 특징이다[위키백과에서]

조선 전기부터 최근까지 연지의 소유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안성이 본관인 이숙번(李叔蕃)[1373~1440]이 연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숙번은 사위이자 강희맹의 양부인 강순덕(姜順德)[1398~1459]에게 딸의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연지를 비롯한 주변의 토지를 물려주었다. 이후 이숙번의 장녀는 강순덕 사이에 자식 없이 사망하였다. 강순덕은 대를 잇기 위해 조카 강희맹을 양자로 들이고 재산을 물려주었다. 강희맹 또한 권만형을 사위로 들이고 딸의 재산으로 연지와 주변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이후 관곡지 일대는 안동 권씨 화천군파에 대대로 내려왔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때문에 연지와 관련된 고문서는 안동 권씨 일족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관곡지 관련 안동 권씨의 고문서는 『안산군수 서목(安山郡守書目)』[1845], 『연지사적』[1846], 「안산군 완문(安山郡完文)」[1883], 「연지준지기(蓮池浚池記)」[1900] 등이 있다. 고문헌은 대부분 연지의 유래 및 수축 사실 그리고 연지기의 역할과 면역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연지사적』은 경기감영의 재가를 받아 연지기의 잡역 면제 처분 받기를 종용하고 있다. 연지는 수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연꽃을 죽이고 피폐하게 된다. 이에 정기적인 관리를 위해 인근 하중리의 백성 중에 연지기를 뽑은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생업과 잡역에 시달리기에 연못 관리에 소홀하였다. 때문에 연지기 여섯 명에게는 신포(身布), 연역(烟役)을 면제시키고 환곡을 부담하는 환호(還戶)에서 벗어나도록 배려하였다. 덧붙여 『연지사적』은 연지의 유래 및 수축 사실을 기록한 「서문」과 연지기의 잡역 면제에 대한 「연지수치후보초(蓮池修治後報草)」로 나뉜다. 특히 보초에는 하중리에 거주하는 연지기 6명의 명단, 결원 여부, 연지 관리 시 준수 사항 등을 기록하였다. 나머지 『안산군수 서목』, 「안산군 완문」도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안산군수 서목』은 연지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서목은 상사에게 올리는 첩보에 첨부되는 문서이다. 안산군 하중리에 연지가 있는데 연못을 관리하는 연지기 6명의 군역과 연역 등 잡역을 부과하지 말자는 내용이다.「안산군 완문」은 연지기의 잡역 면제 요청 이후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쓰여졌다. 완문은 관부에서 집단이나 개인에게 발급하는 확인서이다. 시간이 흘러 면제되었던 잡역이 다시 부과되어 연지 관리가 소홀해졌다. 이에 연지기의 면역을 확인하고 관리에 전념하라고 관에서 발급한 문서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후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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