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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관곡지(官谷池)사진 후편

사공(최명규) 2024. 7. 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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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쓰는 후기글

관곡지의 연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강희맹과 관련이 깊다. 강희맹은 조선 세종부터 성종까지 6대 왕을 모신 유력한 인사였다. 강희맹은 『금양잡록(衿陽雜錄)』과 『촌담해이(村談解頤)』등의 문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희맹이 관곡지와 관련된 행적을 남긴 때는 1463년(세조 9)이다. 1846년(헌종 12) 권용정(權用正)[1801~1861]이 지은 『연지사적(蓮池事蹟)』에 따르면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강희맹은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 난징에서 새로운 품종의 연꽃인 ‘전당홍(錢塘紅)’을 가져와 연못에 심었다. 이 작은 연못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에 있는 관곡지이다. 1466년(세조 12)에 연꽃이 무성해져 ‘연성’, 즉 연꽃의 고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연지 고사(蓮池故事)라 한다. 강희맹과 연지 고사는 1797년(정조 21) 8월 정조의 제10차 원행 때 안산 지역 유생들에게 시제(詩題)로 내려진다. 그 내용은 “중국 난징에 갔던 사신이 항저우[杭州]의 전당홍이라는 연꽃 종자를 가져와 읍의 별호를 연성이라 하였다[奉使南京取錢塘紅種之號曰蓮城].”는 것이다. 정조가 조선시대 시흥 지역이었던 안산군의 별호가 연지 고사에서 비롯된 연성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재확인해 준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관곡지’라는 한자명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은 조선시대에는 안산군 초산면 하중리였다. 때문에 조선시대 시흥 지역은 안산군을 서술한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관곡지를 언급한 가장 이른 기록은 조선 후기 1842년(헌종 8)에 편찬된 『안산군읍지』이다. 안산군 대월면 산대장(山垈場) 앞에는 제언(堤堰)인 오취(烏嘴)와 전당(錢塘)이라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오취는 수십 석락지(石落只)[논밭의 면적을 헤아리는 단위로 1석락지는 2~3천 평 정도]에 물을 댈 수 있는 제방이며 전당은 ‘전당연(錢塘蓮)’이 자라는 못이라는 뜻이다. 후자에서 안산군의 읍명 중 하나인 연성이 유래하였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관곡지(官谷池)는 경기도 시흥시에 있는 연못이다. 1986년 3월 3일 시흥시의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었다.

관곡지의 규모는 가로 23m, 세로 18.5m이다. 이 연못은 조선 전기의 농학자인 강희맹이 세조 9년 명나라에 다녀와 중국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 씨를 채취해, 지금의 시흥시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 씨를 심어 재배하여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안산군의 별호를 1466년 세조 12년부터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는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의 집 가에 있어 대대로 권만형의 후손 소유가 되어 관리 되어오고 있으며, 현재 시흥관내의 연성초등학교, 연성중학교 등 교명과 연성동의 동명 및 시흥시의 문화제 명칭인 《연성문화제》라는 이름은 이 못에서 유례되었다.[위키백과에서]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는 달리 꽃은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한 담홍색을 지니고 있는게 특징이다

편집을 마치며

해마다 한 두번씩은 오는 곳이다, 시기적으로 이르다는 공감대가 있는데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뭉첫다, 쏘나기라도 한줄기 했으면 하는 기대로 우산도 챙겼다, 너무덥다, 자꾸만 거늘을 찾게 됨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동안 쉼터에서 시간을 보내도 보고 어쩔 수 없아 땡볕에 나와 수련에다 초점을 맟춰 본다, 무었보다도 관곡지를 돌아나와 먹는 냉면 한 그릇, 일품이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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