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세상/디카 사진

양사언 선생님 묘소

사공(최명규) 2006. 5. 29. 10:23
양사언 선생님 묘소


봉래 양사언(1517~1584)은 이조 때의 이름난 시인이며 서예가이다. 그의 아버지는 
음관(과거를 보지 않고 문벌에 의하여 받는 벼슬)으로 영암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양봉래는 그의 첩의 자식이었다.
양봉래의 어머니는 고을의 하급 아전인 장교의 딸이었다. 그녀가 12살 때 
부모들이 들일을 나가고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지나가던 영암군수가 들러 
점심을 먹었다. 이 때 군수는 점심시중을 잘 들어준 어여쁘고 영리한 소녀에게 
두개의 색부채를 소녀에게 주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몇해 
후 군수는 소녀를 첩으로 데려가게 된다.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겼는데 그가 바로 양사언이었다. 
양사언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눈에는 맑은 총기가 넘쳐 흘렀으며 행동거지가 
의젓하여 사람들은 그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첩의 자식으로서 적서의 차별이 심한 당시 사회에서는 아무리 촉망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상사람 취급을 당하며 평생을 지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한 양사언이 당대에는 물론 후세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 것에는 
남다른 사연이 있는데 남편이 죽은지 사흘째 되는 잘 본처의 자식들 앞에서 
자기의 아들을 자식이라고 박대하지 말것을 마지막 유언으로 남기고 
자결한 어머니의 참혹한 최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어머니의 자결은 오히려 어린 양사언에게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인지 양사언은 성장하여 벼슬도 하지만 주로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편답하면서 
시를 짓고 글 쓰는 것을 평생의 낙으로 삼았다.
양사언은 그 가운데에서도 금강산을 특히 사랑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호를 
봉래산(여름에 부르는 금강산의 이름)에서 따서 봉래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금강산하면 양봉래를 생각할 정도로 그는 금강산을 노래한 많은 시를 썼으며 
명소들에 적지 않은 글을 새겨 놓았다. 지금도 만폭동 골안의 너럭바위에 올라 서면 
양봉래가 써 놓았다는 봉래풍악원화동천 (봉래, 풍악은 다 금강산을 말하며 
원화동천은 만폭동의 다른 이름인데 금강산의 기묘하고 아름다움을 다 구현한 으뜸가는 
곳이라는 뜻)의 여덟글자와 '만폭동'이라는 세글자를 볼 수 있다.
금강산에 온 넋을 바치다시피 한 양봉래는 끝없는 희열감에 명승들을 빠짐없이 찾았으며 
이르는 곳마다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어느 날 금강산 절승의 하나인 불정대에 올라 
십이폭포의 장쾌한 전경을 바라보던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뫼부리로 안주삼고
동해물로 술빚어라
삐죽한 봉우리들 
하늘 높이 솟앗으니
취하지 않고서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날리는 폭포수는
바람앞의 물
높이 솟은 불정대는
하늘밖의 산
만폭동에 있는 명승지의 하나인 법기봉 허리의 아슬아슬한 절벽위에 매달린것 같은 
보덕암을 보면서
보덕암 구기기동
햇빛받아 번쩍이고
봉우리들 눈빛인양
먼 하늘에 잇닿았네
천길이나 깊은 굴에
신선네들 있으리니
이내 몸 란새되어
구름타고 날았으면...
라고 자신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양봉래는 한때 흰 백사장에 푸른 솔숲이 우거진 속에 있는 아담한 호수 감호옆에 
집을 짓고 이런 시를 읊었다.
그대 어이 이 고장에 자리를 잡았나
내 답하리 천하명승 이보다 못하여라고
흰 모래 푸른 바다 소나무숲 길을 막고
일만송이 고운 연꽃 내집을 단장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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