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로 본 세상

수승대 3 [벌초 길] 관수루와 거북바위

사공(최명규) 2012. 9. 9. 19:47

관수루

 

위천 수승대의 구연서원 문루이다. 요수 신권1)이 1540년에 구연재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1573년 그가 작고하자 사림이 구연 서원을 세우고, 성팽년과 함께 배향했다.
관수루는 1740년에 건립했다.

‘관수(觀水)’란 『맹자』진심장구 상편에 ‘물을 보는 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여 선비의 학문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지었다.

누각에는 1743년에 함안 조영우가 지은 <관수루기>, 황고(黃皐) 신수이(愼守彛), 함안 조영우의 <관수루>,

1808년 김인순(金麟淳)의 <삼가 관아재 운을 빌어(謹次觀我齋韻)>, 경자년 옥천 진사 임철한(林撤漢)이 지은

<관수루>·<수승대>, 월성 김동준(金東準)의 차운시, 병오년 신병교의 차운시, 1966년 문재근(文宰根)이 지은

<삼고 산고수장비의 운을 빌어(謹次山高水長碑韻)>, 기미년 신태도(申泰道)가 지은

<판상 운을 빌어 두 수를 짓다(次板上韻二首)>

일족 후손 용성(用晟), 일족 후학 종립(宗立)이 지은 <삼가 황고선생 운을 빌어(謹次黃皐先生韻)>,

경술년 12세손 홍성(鴻晟)이 지은 <삼가 관수루 운을 빌어(敬次觀水樓韻)>, 요수 11세손 종현(宗賢)이 지은

<수승대 유감(搜勝臺有感)>등의 판상시가 걸려 있다.

누각 규모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에 계자난간을 둘렀고, 팔작지붕 형태에 네 처마를 활주로 버텼다.

누각 1층은 구연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의 구실을 하고 있다.
수승대를 들어서서 이 문루를 지나기 전에 ‘요수 신 선생이 은거하여 수양하던 곳(樂水愼先生藏修之地)’이란

편액에서 보듯이 이 곳은 거창 신 씨 문중의 역사를 전하는 곳과 다름없다.

족보를 상고하면 거창 신 씨는 북송 신종 때(1086) 고려 문종조에 귀화한 신수(愼修)를 시조로 삼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왕비와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요수 신권(愼權)은 이 곳에서 심신을 수양하며, 중종 35년(1540)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를 가르쳤고,

이듬해 함양재(涵養齋)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 요수정(樂水亭)을 지었으니, 1542년이었다. 1573년에 그가 죽자,

사림이 구연 서원을 세우고, 석곡 성팽년(成彭年)과 함께 배향하다가 영조 16년(1740)에 관수루를 세우고,

순조 8년(1808)에 요수의 5대손 황고 신수이를 함께 추향했다.

누각 주위의 겨완은 안의 삼동 중에서 원학동이 가장 으뜸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우며, 물과 솔과 누각,정자가

어우러져 찾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거창의 대표적 명승지이다.
특히 거북모양을 한 대위에는 스무남은 명이 앉을 수 있는 넓직한 공간이 있고, 솔바람을 맞으면서 주위 경관을

구경하노라면 저도 모르게 도인이 된 기분이 들며, 대 아래 ‘구연’이란 연못은 푸른 물이 고여 있어

관수루의 의미를 한층 깊게 해 준다.
[관련 싸이트에서]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