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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두루미와 백마고지 (평화누리길 12코스 일부)

사공(최명규) 2023. 1. 6. 16:30

백마고지역(Baengmagoji station, 白馬高地驛)은 대한민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 위치한 경원선의 철도역이다.연혁[편집]
경원선 복원 당시 기존 철원역이 민통선 내부에 있어 민통선 밖의 철원읍 대마리에 이 역이 대체·신설되었다. 철원의 일부 문학회 회원들과 인근 오대미마을 주민들은 인근에 소설가 이태준의 생가 터가 있는 점에서 역명을 이태준역으로 하기를 희망했으나,[1] 인근에서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에서 이름을 따와 현재의 역명으로 정해졌다. 처음에는 경원선의 기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관할 군 부대의 반대로 터널과 고가 구간을 거쳐 넘어오는 현재의 신규 노선으로 변경되었다.
구조[편집]
지상 1층 규모의 지상역으로, 역 구내는 1면 1선의 승강장만 있을 뿐, 대피선이나 회차 시설은 없다. 승강장 북쪽 끝에는 철도중단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본선은 승강장을 북쪽으로 조금 벗어난 지점에서 끊긴다. 역 구내에에는 대마리 부녀회에서 운영중인 철원군 농특산물 판매장과 간이식당이 있다.[위키백과에서]

2022년 1월 5일

동심회 목요도보 첫 목적지 백마고지와 고대산 역 고드름

 6시에 집을나서 10시가 다 된 시간에 백마고지역에 내려서,기념 촬영하고 첫 목적지 백마고지로 발길을 옮긴다, 그동안 영하 10도 가까이 기온이 떨어지는 추운날씨 였는데 오늘은 기온도 오르고, 바람도 없고, 하늘은 맑고, 들에는 하얀 눈이 덥혀있는 기분 좋은 시골 풍경이다, 

얼마전 드론이 남하해서 용산상공을 돌아 북으로 돌아간 것 때문에,? 아니면 이태원 참사 청문회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무얼 가지고 시끄러워도 항상 시끄러운 곳, 그런 곳을 벗어나 우리는 지금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고향에와 있다, 두루미 마을을 내려다 보며 두루미를 보고, 테극기 아래서 수 없는 젊은이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 현장이라는 생각에 경근한 마음으로 잠시나마 역사가 되어버린 영령들을 생각해 본다,고개를 들어 멀리 아른그리는 북녁땅을 바리본다, 민통선 경계선에서 너무도 조용한 겨울 농한기의  시골 풍경은 오랬동안 바라보고 가슴에담아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편집자 주]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이다.배경[편집]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 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년 9월 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전투 과정[편집]

10월 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대장 장융후이는 제38군단 6개 연대의 지원부대병력 등 총병력 4만 4,056명과 각종포 55문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봉래호의 제방을 폭파시켜 역곡천을 범람시킴으로써 국군을 기습 공격했다.

이로 인해 제3대대가 증원 병력을 투입하는 데 차질을 빚어 중공군이 395 고지로 맹렬히 돌격했고 제30보병연대 1대대장 김영선 소령의 휘하 군대와 3차례나 전투를 치렀으나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러나 10월 7일 중공군은 다시 제4차 공세를 감행해 2개 대대로 1대의 전초 기지를 포위해 지속적으로 보병 돌격과 지원 포격을 감행해 395 고지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에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가 투입되어 2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395 고지를 탈환했다.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10월 8일 중공군 제38군 예비 연대를 투입해 제5차 공세를 가해 오전 8시 다시 395 고지 정상을 점령했으나 최창용 중령의 제28보병연대 제3대대가 반격하여 23시에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불과 3일 동안 5차례에 걸친 공방전으로 중공군 제38군 113, 114보병사단의 피해가 심각했으나 제28보병연대는 물론 제30보병연대도 재편성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할 피해를 입어 김종오 소장은 제29보병연대의 투입을 검토한다.

10월 9일 다시 중공군이 제6차 공세를 펼쳐 제30보병연대는 전력이 바닥나 3시간 만에 고지 정상과 우측 능성을 내주고 후퇴하지만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가 투입되어 역습을 감행해 고지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자 중공군 제38군 사령부는 제112보병사단의 연대까지 동원해 10월 10일 대규모 인해 전술을 펼치고 제9보병사단의 잔병들도 참호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펼쳤다.

이날 3차례의 함락과 탈환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중공군이 최종적으로 고지를 장악했으나 10월 11일 오전 이대철 소령의 제29보병연대 1대대가 김경진 소령의 2대대 병력을 증원받아 고지를 탈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김경진 소령은 전투 과정에서 박격포탄을 맞아 전사했다.

이후에도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어 10월 15일 새벽 제28보병연대는 기습을 감행해 395 고지를 완전히 장악하고 제29보병연대도 고지 북방의 전초 기지를 탈환해 중공군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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