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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의주길 제3길 쌍미륵길(1부 파주혜음지와 쌍미륵)

사공(최명규) 2023. 2. 19. 22:51

의주길 제3길 쌍미륵길

2023년2월18일 포근한 날씨가 운무가 끼인 듯 뿌연 하루다, 혜음지에서 걸음을 시작한다,

소요시간4시간 30분 (14km)
  • 용미3리
  • 용암사
    마애이불입상
  • 윤관장군묘
  • 광탄삼거리
  • 신산5리
    버스정류장
스탬프
  • -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용암사 주차장 계단 앞
  •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651-9)
  • - 윤관장군묘: 윤관장군묘 주차장
  •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406-3)

파주 혜음원지 (사적 제464호)

혜음원은 개경과 남경 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고려 1122년(예종 17)에 건립된 국립 숙박시설이며, 국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도 축조되었습니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혜음령이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여 그 위치를 추정만 하다가 1999년 주민의 제보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혜음원이라고 새겨진 암막새가 발견되어 현재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경기옛길 홈에서]

파주 혜음원지(坡州 惠蔭院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고려시대의 관아 유적지이다. 2002년 9월 16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5년 6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64호 파주용미리혜음원지로 승격[2]되었고, 2011년 7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혜음원(惠蔭院)은 고려 예종 때 남경과 개성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의 안전을 위해 창건된 국립숙박시설로서 인종 이후에는 왕이 숙박하는 행궁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고 전하며, 2001년 이후 지속적인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고려 시대 각 계층의 생활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는 중요한 유적이다.[위키백과에서]

공사중 ; 길을 넓이는 작업

멀리서 줌인

리본을 따라가다보면 논뚝길을 걷는다, 길은 허물어지고 질퍽거리고 위험하다,

남의 집 마당으로 지나간다

산으로 올라 무덤 앞으로 해서 용암사 주차장 계단옆 스템프함에 도착하는데 

스템프함이 입을 다물지 못한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보물 제93호)

‘쌍미륵’이라고도 불리는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 입상은 대략 11세기경 제작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합니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맞이한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며 사라졌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즉시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탄생설화와 연관되어 있는 등 고려시대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坡州 龍尾里 磨崖二佛立像)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93호 파주용미리석불입상(坡州龍尾里石佛立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오른쪽 석불은 사각형 모자, 왼쪽 석불은 둥근 모자를 쓴 모습이므로 용미리 쌍미륵 석불이라고도 한다.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만든 것으로 바위 면에는 몸체를 새기고 몸체 위에는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조성해서 올린 특이한 불상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으로 신체의 비례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지만 워낙 당당하고 거대한 불상이라 엄청난 힘을 느끼게 한다.[위키백과에서]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암사의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커다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하고 웅장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사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사각형의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고려 선종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까지 맞이했지만, 여전히 왕자가 없었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 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매우 시장하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꿈을 깬 궁주가 하도 이상하여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곧 사람을 장지산에 보내어 알아 오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다 두 도승을 새기게 하여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그 해에 왕자인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그다지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위키백과에서]

미륵앞에 있는 소나무가 쓰러젖다, 미륵과 오랜세월 함께했는데 뿌리체 뽑혀 눟어있다,안쪽 코느 아래도 산사태로 난간만 공중에 떠 있어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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