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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길 제5길 임진나루길 1부 화석정과 장산 전망대

사공(최명규) 2023. 2. 25. 14:29

의주길 마지막 구간을 걷기위해 오늘도 길을 나선다

선유시장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 제4길 파주 고을길 길 끝지점, 그리고 제5길 임진 나루길 출발점에선다, 트랭글과 경기옛길앱을 열고 출발한다, 처음 걷는 길이라 보는 것 마다 신기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시골의 정겨운 풍경이  옛길을 걷는 의미를 더한다, 작은 고개를 넘어 도로에서 샛길로 방향을 바뀌 동래를 향해 내려가는데 화석정 문화유산 스템프가 찍혔다고 알린다, 주변을 으아하게 생각하며 주변을 살핀다 그런데 가는방향 저아래쪽 마을회관 뒤로 낮잌은 풍경 화석정이 보였다, 평화누리길 때는 율곡습지에서 오면 반대방향으로 아래서 올라오다 화석정쪽으로 가는데,이렇게 가까이 화석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반가운 화석정을 둘러싸고 있는 고목들의 모습을 더 잘볼 수있다, 화석정엔 몇번 와 보았지만 지금 강물이 만수위라서 그 때도 그랬나 생각해 보지만 지금 이 풍경기 낮설기만하다,

그리고 발길은 장산 전망대로 이동한다,탁트인 전망대에 도착해서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앞 벌판과 초평도의 평화로운 풍경이 꽉 차 흐르는 한강물과 함께 정겹기만 하다, 이런 풍경속에서 식사도 하고 휴식도 한다  [편집자 주]

경노이틸이라는 멘트가 나온다, 이서화 선샌님의 묘다 궁금해서 그곳을 방문했다,

이세화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60호)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청백리인 쌍백당 이세화(1630~1701) 선생의 묘소입니다. 청백리란 청렴 결백한 관리에게 국가가 내린 표창을 말합니다. 1657년(효종 8)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황해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인조·형조·병조·예조·이조판서를 두루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조정에서는 충신을 상징하는 정문을 고향에 세우고 영의정의 관직을 내렸습니다.[경기옛길 홈에서]

화석정(花石亭)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조선시대 양식의 건축물이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를 지니고 있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으며, 이이가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는 등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1] 율곡리는 이이의 고향이며, 당시에는 서원도 있었으나 지금은 화석정만 남아 있다. 화석정의 현판 글씨는 박정희의 친필이다.[2] 건물 안쪽 뒷면에는 이이가 여덟 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강기슭 쪽에는 철책선이 처져 있다.[1] 1974년 9월 26일 경기도의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위키백과에서]

화석정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

임진각 관광지는 군사분계선에서 불과 7km 곳에 있습니다. 평화누리공원, 북한기념관, 망배단, 자유의 다리 등이 임진각에 있습니다. 자유의 다리는 1953년에 건설된 다리로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원래는 경의선 철교였지만 하행선 철교를 도로교로 개조하였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에 한국군과 유엔군 포로 12,773명이 자유를 찾아 귀환한 다리라고 해서 ‘자유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징하는 다리이지만 7·4 남북공동서명 이후 남북회담 대표들이 지나다닌,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다리이기도 합니다.[경기옛길 홈에서]

율곡리 임진강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 양식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초익공(初翼工) 형태이다. 정자에 서면 바로 밑을 흐르는 임진강을 굽어볼 수 있고, 난간에 기대어 보면 서울의 삼각산과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세종 25년(1443) 율곡 이이(李珥)의 5대 조부인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이 세운 것을 성종 9년(1478) 율곡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보수하고 몽암(夢庵)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정자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장인 평천장(平泉莊: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함)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花石’을 따서 정자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이이(李珥)가 다시 중수하여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 난 후에는 이곳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이곳을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 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 후 80여년간 빈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이이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이후방(李厚坊)이 복원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정자는 1966년 경기도 파주시 유림들이 다시 복원하고 1973년 정부가 실시한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단청되고 주위도 정화되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위키백과에서]

『팔세부시(八歲賦詩)』

 

林亭秋已晩 / 騷客意無窮

숲에는 가을이 저물어 가매 / 시인의 시정은 그지없어라.

遠水連天碧 / 霜楓向日紅
물빛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 단풍은 햇빛 따라 불타올라라.

山吐孤輪月 / 江含萬里風
산에는 둥근 달이 솟아오르고 / 강에는 끝없는 바람 어려라.

塞鴻何處去 / 聲斷暮雲中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저무는 구름 새로 소리 끊겨라.[위키백과에서]

초평도(草坪島)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의 북부에 위치한 임진강 하중도이다. 섬의 면적은 1.765km2이고, 섬 전체가 민통선 북쪽에 위치해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멸종위기 동물이 서식하는 등 자연의 보고로 남아 있다.[1]

원래 대부분 이었던 이 섬은 한국 전쟁 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습지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는데, 환경부가 2012년 초에 임진강하구 습지보호구역을 지정하면서 정작 그 핵심 지역인 초평도는 제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2] 2009년 2월에는 큰 화재가 나서 섬 전체의 약 30%인 50만m²에서 갈대와 잡풀 등이 불에 탔다.[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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