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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장릉 2022,11,05,

사공(최명규) 2022. 11. 7. 13:55

김포장릉 

2022,11,05,

대중교통

  • 김포골드라인 사우(김포시청)역 3번출구 : 장릉 방향 도보 15분
  • 5호선 송정역 1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 2, 60, 60-3, 88, 388번 버스, 3000번 광역버스 이용
    * 버스정류장 명칭 : 사우고.김포시청 → 하차 후 장릉 방향 도보 20분
  • 5호선 송정역 1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 1002번 버스 이용
  • 인천1호선, 공항철도 계양역 1번출구 : 81, 81-1번 버스 이용
  • 5호선 광화문역 광화문사거리, 2·6호선 합정역 6번출구 중앙버스정류장 : 1004번 광역버스 이용
    * 버스정류장 명칭 : 장릉입구 → 하차 후 장릉 방향 도보 20분         [김포장능 홈페지에서]

 

김포 장릉(金浦 章陵)은 사적 제20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이다.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元宗, 1580∼1619)과 부인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의 무덤이다.

원종은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으로, 광해군 즉위 후 신경희 등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실패하여 능창군이 유배되어 사약을 받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내다가 광해군 11년(1619)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반정(1623)으로 맏아들인 능양군이 인조로 즉위하자 대원군에 추존되었다가, 인조 10년(1632)에 다시 원종으로 추존었다. 인헌왕후 구씨는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3세에 정원군과 혼인하여 세 아들을 낳았으며 인조 4년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원종과 함께 왕후로 추존되었다.

처음에 원종의 무덤은 양주군 곡촌리에 있었으나 인조 5년(1627)에 지금 위치로 이장하여 흥경원(興慶園)이라 하였고 왕으로 추존되면서 능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두어 쌍릉을 이루고 있는데 봉분 밑에 얕은 호석(護石)을 둘렀을 뿐 난간석은 없다. 봉분 앞에는 각각 상석(床石)을 두었고 중간에 장명등, 문인석(文人石)과 무인석(武人石)이 서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丁字閣)에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의 중심축은 정자각 중앙과 양 능의 중앙까지 직선축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쌍릉은 왕우비좌(王右妃左 : 왕은 오른쪽에 왕비는 왼쪽에 안치한다)에 따르는데 이는 능을 기준으로 하는 위치이며, 능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왼쪽이 왕릉이고 오른쪽에 왕비 능이다.(경기문화포털) 무덤 아래에는 영조 29년(1753)에 세운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부左)’라고 새긴 비각이 있다.

김포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위키백과에서)

https://tv.kakao.com/channel/2876637/cliplink/433319222

 

경기옛길 강화길 제1길 천등고갯길을 완주하고 제2길 금릉옛길을 따라 계속간다,중간에 식사도 하고 김포장능에 도착해서 내부를 관람한다,곱게 물든 단풍이 관람객들을 반기고 오후 기울어진 했볕이 반사되 유난히 붉고 아름답다, 능을 둘러 보고 산책로를 따라 주변 풍경을 감상한다, 맨 아래쪽 연못에는 원앙 집단 서식지가 있었다,, 사간이 없어 자세하게 살필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사진 편집중에 너무 많은 원앙을 확인하고 놀랏다, 약 20km이상 걷고 지친 상태다, 2코스까지 완주하는게 목표였지만 사우역에서 종료한다

원종(元宗) 이야기

원종(재세 : 1580년 음력 6월 22일 ~ 1619년 음력 12월 29일)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년(선조 13)에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를 전해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지에서 자결하였고, 정원군은 그의 화병으로 1619년(광해군 11)에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으로 첫째 아들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사친으로 정원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정통성 문제로 인해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인헌왕후(仁獻王后) 이야기

인헌왕후 구씨(재세 : 1578년 음력 4월 17일 ~ 1626년 음력 1월 14일)는 본관이 능성인 능안부원군 구사맹과 평산부부인 신씨의 딸로 1578년(선조 11)에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원종)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원종 사이에서 3남(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을 낳았다. 1623년(인조 1)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啓運宮)이라는 궁호를 받았다. 이후 1626년(인조 4)에 경덕궁(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32년(인조 10)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능 앞 아래쪽 저수지는 원앙 집단 서식지

이회택 선수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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