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일상다반사

독립문 역에서 종로3가 까지 2부 (경복궁과 운현궁)

사공(최명규) 2022. 12. 19. 14:06

2022년 12월,17일

 

경복궁(景福宮, 영어: Gyeongbokgung Palace)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청와대로에 있는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이다. 태조 4년인 1395년 창건되어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어 현재 복원사업이 진행중이다.

주례》 〈고공기〉에 입각하여 건축되었다. 3문 3조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외조, 내조, 연조이다. 내조는 근정전을 중심으로 하는데, 궁 밖에서 근정전까지 바깥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이다.[위키백과에서]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그 임무를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하자 먼저 종묘  사직의 건설에 착수한 다음,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1][2]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협소하여,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3][4] 새 궁궐 경복궁은 태조 4년(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5] 그러나 이 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이루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위키백과에서]

https://tv.kakao.com/v/434381109

https://tv.kakao.com/v/434385314동영상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2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2][7]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5][8]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9]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9]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태조 7년(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6]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6]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6][10]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태조 7년때로 추정된다.

경복궁은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계속해서 전각이 더 지어지고 보완되었는데,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이를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하였는가 하면,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이용케 하였다.[5] 경복궁이 조선 왕조의 법궁다운 면모를 갖춘 것은 세종 때였는데, 1426년(세종 8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에서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올렸으니[2]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이 이때 지어진다. 그리고 1429년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하였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시설이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 보수되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라간다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조선시대 연회를 하거나, 외국의 사신(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파견되는 신하)을 접견하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위키백과에서]

원래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짓도록 명하여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이 완성하였다. 초기의 모습은 《궁궐지》, 《태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전한다.[2]:63-64

이후 성종 6년(1475)에 근정전, 광화문, 흥례문의 기와를 청기와로 덮으며 경회루도 증축한다. 연산군 대에는 경회루를 화려하게 치장했다가 중종이 기물들을 헐어냈다.[3] 중종은 경복궁의 다른 건물들과 격이 맞도록 경회루에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

임진왜란 전의 경회루는 유득공의 《춘성유기(春城遊記)》에 "남아 있는 경회루의 돌기둥은 그 높이가 세 길(10m)이나 되고 모두 마흔 여덟 개인데. . ."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흥선대원군 때 다시 지은 경회루와 같은 규모인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3층 구조에 높이는 100척에[주해 1] 48개의 돌기둥에 승천하는 들이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재총화》에서는 류큐국의 사신이 조선의 세 가지 장관 중에 하나로 경회루 돌기둥을 꼽으면서 이르기를 ‘돌기둥에 가로세로 그림을 새겨 놓아서 용이 거꾸로 물 속에 그림자를 지어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보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모습을 들었다고 적었다.[2]:65 그러나 이는 고종 당시 중건할 때 반영되지 않는다.

방지 서쪽에 만세산(萬歲山)이 조성되어 전국의 화려한 꽃들을 심고 봉래궁(蓬萊宮),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궁(碧雲宮) 등 상징적인 작은 모형궁을 만들고 금·은·비단으로 장식하였다고 한다. 또 연못 속에는 연꽃을 띄우고 산호(珊瑚)를 꽂아 놓고 황룡주(黃龍舟)란 유선(遊船)을 타고 왕이 만세산(萬歲山)을 왕래하였다. 때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한 비단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 위에 띄우고 촛불을 켜고 향을 피워 밤이 낮같이 밝을 정도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위키백과에서]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서, 고종이 탄생하여 즉위하기 전 12살까지 살았던 잠저이기도 하다. 운현궁의 이름은 서운관(書雲觀, 관상감의 별칭)이 있는 앞의 고개라 하여 운현(雲峴)이라 불렸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때 여기서 청나라 톈진으로 납치되었다. 한때는 궁궐에 견줄 만큼 크고 웅장하였다고 한다. 이로당 뒷편에 있던 고종이 소년 시절에 자주 오른 노송(老松)은 현재는 사라지고, 그를 추양하는 경송비만이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교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 제257호로 지정하였다

.[위키백과에서]

조선시대 일반 상류주택이었던 이 건물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영역이 크게 넓혀지고 건물들도 새로 더 들어서며 흥선대원군이 10여 년간 집정하며 정치를 하는 곳으로 변모하였다. 실제로 고종이 살았던 집은 운현궁 동북쪽 뒤에 있었는데, 1966년에 헐리고 그 자리에 중앙문화센터가 세워졌다. 현재의 건물은 대원군이 섭정을 행하던 1863년 ~ 1873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인데, 노락당과 노안당은 1864년 9월, 이로당은 1870년 준공되었다.

운현궁은 원래 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 부설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양관(洋館), 일본 문화원, 중앙문화센터, 운현초등학교 일대까지 포함된 넓은 지역이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다. 1940년대 후반에는 대한민청의 본부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1996년 새로 중수하여 개방한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의 세 건물과 부속 행랑채를 운현궁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운현궁 터는 복원하면서 대지를 동서로 크게 양분하여, 동편에는 세 건물들이 들어섰고, 서편은 빈 마당으로 남겨 도로와 접하고 있다. 동편에 있는 세 건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대원군의 사랑채였던 노안당, 안채인 노락당, 그리고 별당인 이로당(二老堂) 순서로 자리 잡고 있다. 노안당 남쪽에 원래 아재당(我在堂)이 있었으나 없어졌고, 이로당 북쪽에 있던 영로당(永老堂)도 원래 운현궁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개인 소유의 건물(김승현 가옥,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9호)로 되어 운형궁 경역과는 담으로 구분되어 있다.

현존하는 운현궁의 건물들은 격식이나 규모로 보아 궁실의 내전 건물에 가깝다. 평면에 보이는 특징으로 각 채들의 동측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월랑(月廊)으로 연결시킨 점을 들 수 있다. 창덕궁에서 고종이 손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경근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또 대원군 전용문인 공근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노안당[원본 편집]

노안당의 '노안(老安)'은 《논어》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여준다(老者安之)"에서 유래하였다. 노안당은 전체적으로 정(丁)자형의 건물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몸채 동쪽 끝에 7칸이 덧붙었다. 몸채부는 동쪽 2칸 사랑방을 제외하고 모두 우물마루로 되었으며, 동쪽 끝에서 남으로 돌출한 2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었는데, 영화루(迎和樓)라고 한다. 누마루의 하부에는 판장벽을 막고 홍예문을 만드는 등, 실용적이며 장식적인 의장을 선보인다. 지붕 박공 부분 중 뒷면 두 군데에 회벽을 쌓고 중앙에 복(福)을 상징하는 박쥐를 그려 넣었다. 영화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맞아 접대하던 곳이다.

노안당의 몸채는 장대석의 세벌대이고, 영화루는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있다.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쌍사모를 한 기둥을 세워 기둥머리에는 초익공을 결구하였다. 가구(架構)는 2고주 5량이고, 뒤쪽으로 내민 부분은 1고주 5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에는 송판으로 만든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단 차양은 고전적 수법이다.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노락당[원본 편집]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전체적으로 자 모양을 취하고 있으며, 정면 3칸은 앞퇴를 개방했고, 좌협간 2칸 중에서 한 칸 부분이 개방되어 좌측 날개 부분의 통로 역할을 한다. 좌우 각 2칸은 온돌, 중앙 3칸은 대청이다. 좌우측의 날개 부분 즉 안채의 몸채에서 직각으로 꺾여 있는 부분은 돌출부가 각 2칸이며 부엌과 창고로 쓰였다. 노락당은 초익공 7량 건물로 사대부가의 건축미를 느낄 수 있는 기법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아름다운 창살 문양이 남아있다.

노락당 남쪽의 남행각은 자 모양의 평면을 하여 자 모양의 평면을 한 노락당과 함께 자 모양의 안마당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명성황후 민씨가 삼간택을 마친 후 왕비수업을 받았던 곳이고, 고종 3년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의 가례가 있었던 곳이다.

이로당[원본 편집]

별당인 이로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오로지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비밀스럽고 은밀한 건물이었다. 이로당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가 거처하던 곳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정방형주초(正方形柱礎)이고 기둥은 평주, 고주 모두 사각기둥으로 약간의 민흘림이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나 툇마루는 장마루이고 가구는 입구자형 평면에서 남쪽은 1고주 5량, 서쪽과 북쪽은 1고주 3량, 동쪽은 평4량(平四樑)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인 서북쪽 모서리를 제외하고 모두 팔작지붕이다. 정면 앞마당 서쪽으로는 석함, 동쪽으로는 요거석이 있고, 동쪽 마당에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사직단에서 광화문으로 이동해서 경복궁을 둘러본다, 방문객들 중에 외국인이 많은 둣 하고 추운날씨에 한복을 어슬프게 입고 추위를 견디는 풍경도 볼 수 가있는데 그래도 여행의 즐거움은 포기할 수가 없는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서산으로 기운 엷은 했살을 받으며 매서운 서울 추위를 추억으로 담아가길 당부해 본다 

다시길을나서 운현궁에도착해서 이조말 세국정치와 왕조의 멸망, 나라의 비운 ---그리고 지금까지  그 현장이라는 감회에 젖는다,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발길은 종로 3가역에 닿는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