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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역에서 종로3가 까지 1부 (서대문 형무소와 사직단)

사공(최명규) 2022. 12. 19. 13:07

2022년 12월 17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Former Seodaemun Prison, Seoul')는 일제 통감부가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해 1907년에 오늘날의 서대문구 지역에 건설하여 1908년 10월에 문을 연 감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해방 후에는 주로 서울 구치소라 불리며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서울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면서 1987년 10월에 폐쇄되었고, 그 후로 역사성과 보존가치 등을 고려하여 일부 시설을 철거한 뒤 나머지 시설들이 1988년 2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1988년 11월 5일부터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가 관리하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재개장하였으며, 1992년부터는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한 독립공원의 주요시설로 기능하고 있다. [위키백과에서]

https://tv.kakao.com/v/434380864

독립문 역 부근에서 모임을 하고 서대문 형무소 관람하고 사직터널을 지나 사직단을 둘러본다, 종로3가역에서 귀가할 예정으로 서울 구경을 나성셈이다

일제의 통감부 대한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한 1907년에 항일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해 현재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근대적 감옥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일본인에게 설계를 맡겼다. 그 설계에 따라 1908년에 완공된 감옥의 첫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다. 최초의 경성감옥은 약 500명을 투옥할 수 있는 560여 평 규모의 목조건물이었으며, 증축 과정에서 수감자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원형 감옥형태인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는 1912년에 현재의 마포구 공덕동에 일명 '마포형무소'로 알려진 또 다른 감옥을 세우고 그 이름을 '경성감옥'이라고 칭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원래의 경성감옥의 이름은 '서대문감옥'으로 바뀌게 되었다. 1923년에 이르러 서대문감옥은 오늘날 잘 알려진 이름인 '서대문형무소'로 개칭하게 된다. '경성감옥'에서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바뀌는 동안 수감인원은 계속하여 증가하였는데, 서대문형무소는 18세 미만의 여성, 10년 이상을 선고받은 자, 그리고 무기수를 수용하였으며, 1944년 기준 2,890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잘 알려진 수감자로는 백범김구 선생, 강우규 열사, 유관순 열사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1945년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1945년 광복 후 서대문형무소의 명칭은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3]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수용되었다.[1] 그러나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주장에 의하면 1949년까지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활동에 따라 이광수, 노덕술 등의 친일파가 수감되었지만, 반민특위 활동이 와해된 후 이승만 정부 치하에서는 오히려 독립운동가였던 정치인들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전쟁 중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기에는 북한군이 반공·친미 인사로 추정한 인물들을 투옥하였으며, 그 후 1950년 서울을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서울형무소에 가두었다.  [위키백과에서]

군사독재에서 폐쇄까지[편집]

1961년에 '서울형무소'의 명칭은 '서울교도소'로 바뀌었고, 4․19혁명 5․16군사정변 등과 같은 정치적 변동에 따라 많은 시국사범들이 수감되었다. 예를 들어 김두한 1947년, 1954년, 1965년, 1966년 등 4차례 서울형무소 및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마지막으로 수감된 원인은 국회 오물투척사건이었다.[4]

그 후 1967년에 '서울교도소'는 '서울구치소'로 그 이름을 바꾸어 1987년에 폐쇄될 때까지 같은 이름을 유지하게 된다.[1] 1987년 11월에 서울구치소는 오늘날의 위치인 경기도 의왕시 안양판교로 143으로 이전하였고,[5] 서대문에 있는 서울구치소 시설은 폐쇄되었다. 정부는 폐쇄된 전체 시설 중에서 역사성과 보존가치가 인정되는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 일부만을 보존하기로 하고 나머지 건물을 모두 철거하였다.[3]

사적 지정 및 역사관 개장[편집]

1988년 2월 27일 서울구치소의 남은 건물들은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라는 명칭 아래 대한민국의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1] 사적의 관리자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는 그 장소를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같은 해 11월 5일 그곳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개장하였다. 그 주변은 같은 시기에 공원으로 조성되기 시작하였으며,[3] 1992년 8월 15일 광복절에 이르러 오늘날 '서대문독립공원'으로 알려진 독립공원으로 개장하게 된다.  [위키백과에서]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 영어: Dongnimmun Arch, Seoul)은 조선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영은문 주초 부근에 서재필 독립협회의 주도로 세워진 뒤,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현재의 위치는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영은문 주초와 함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근린공원 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2]

배경[편집]

개화파의 지식인 서재필 청일전쟁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조선 청나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주독립국이 되었음에도 그 사실을 외국인들은 물론 조선 국민들조차도 널리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의 상징으로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운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이행할 단체로서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2]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은 당시 내외의 압력에 직면하고 있던 조선 정부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하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 정부 및 뒤이은 대한제국 정부는 독립문의 건축에 많은 후원을 하게 되었다.[3]

사직단

고대 중국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 〈고공기〉(考工記)에 실려 있는 좌조우사(左祖右社)에 따라 중국의 여러 왕조는 도성(都城)을 건설할 때 궁궐 왼쪽엔 종묘를, 오른쪽엔 사직단을 두었다. 사직단 위에는 오색토(五色土)라 불리는 각 방위 주변에서 헌상한 오색의 흙이 뿌려졌는데, 오방사상에 따라 가운데는 황색, 동쪽은 청색, 남쪽은 적색, 서쪽은 백색, 북쪽은 흑색으로 꾸며졌다. 이는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에 따라 오색은 만물 즉 천하의 모든 토지를 가리키며,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곳이 없다(普天之下、莫非王土)」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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