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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길(회화역~종각역) 1부 ; 회화문에서 숙정문

사공(최명규) 2023. 1. 13. 22:24

2023년 두번쩨 발걸음은 서울 성곽길중 백악산 구간을 걷는다, 오랬만에 부부 나들이다, 일기예보로는 3월 중순의 봄날씨라했다, 그래서 그런지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았다, 그래도 옷을 좀 두껍게 입었다, 회화역에서 내려 회화문에 도착해서 성곽을 따라 걷는다,[편집자 주]

회화문에서 성을 따라걷는데 성이 사라진다, 동래속에서 짐시 보이지 안타가 좁은길에 학교건물이 보이고 그 벽에 성이 박혀있다, 학교건물이 성을 깔고 않았다, 그 길을 빠저나오면 길 저편에 끊어진 성이 보이는데 와룡공원으로 이어진다, 

와룔공원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와룡공원길 192에 있는 시립 공원이다. 1984년 개장했다.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학생들의 활동 반경에 있다. 15학번 이상의 성균관대학교 학생들 사이에는 2014년 성균관대학교 중앙도서관 수은테러 사건의 유력 용의자가 자살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생활체육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기에 일부 학생들은 공원 내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즐기기도 한다. 성균관대학교 내부의 운동장이 터무니 없이 작고, 축구나 야구 등의 활동이 계속 이어지기에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가기 위해서는 '등산'을 해야 하기에 많은 학생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산 중턱에 세운 공원인지라 배드민턴장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 과거에는 배드민턴장에 안전망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운동을 하다가 장비를 뒤로 빠트리면 영원히 찾을 수가 없었고 사고 위험도 있었다. 2016년 여름 즈음 꽤 높은 안전망이 설치되었다.[위키백과에서]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대조선국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북쪽의 대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三淸洞) 산 2-1번지(북악산 동쪽 고갯마루(근정전동쪽)에 있다.

숙정문은 음양오행상 水, 智를 상징하는 북대문으로서, 1396년(태조 5년)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에 의해 북문을 열어 놓으면 음기(淫氣)가 침범하여 서울 부녀자들의 풍기가 문란해 진다고 하고, 실제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하기도 한 바, 다른 한양도성 문과는 달리 실질적인 성문의 기능은 하지 못하다 1413년 폐쇄되었다. 대신 숙정문에서 약간 서북쪽으로 위치한 창의문(彰義門) 인근, 오늘날의 상명대학교 인접한 지역에 홍지문(弘智門)을 내어 그쪽을 통해 다니게 하고,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원칙적으로 위치상·명목상의 북대문은 숙정문(肅靖門)이나, 오행상·기능적인 북대문은 홍지문(弘智門)으로 여기기도 한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숨진채 발견된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름 유래[편집]

숙정문은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는 북대문으로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 문은 정월대보름 전 세 번 놀러오면 액운이 사라진다는 속설이 있어 여인들이 자주 찾았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발길이 많아졌다고 한다.[1]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숙정문이 처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523년(중종 18)이며, 북정문(北靖門)이란 표현도 나오는데, 숙청문과 숙정문이 혼용되다가 뒤에 자연스럽게 숙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위키백과에서]

역사[편집]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의 상소로 숙정문[觀光坊東嶺路]을 폐쇄하였으며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3]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숙정문을 없애고 오른쪽에 새로이 문을 세우라고 명하였으나[4], 실제로 문을 옮겼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5] 숙정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祈雨)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1968년 1·21 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6]2006년 4월 1일 인근의 성곽 탐방로 1.1km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7] 지금의 숙정문 목조 누각은 소실되었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한 것이며[8],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것이다.

특색[편집]

서울의 도로변에서 볼 수 있는 숭례문이나 흥인지문 그리고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이름 정도로 알려졌던 돈의문과는 달리 유일하게 북악산 기슭에 있는 내륙 소재 관문이어서 1993년 문민정부 당시 북악산 전면개방 이전까지는 세간에서 알려져있지 않았던 관문이었다. 1968년 북한 간첩 출신인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1.21 사태)이 일어나면서 이 때부터 북악산 일대가 전면통제되어서 이후 세대들을 기준으로 숙정문에 대한 인식도 떨어지게 되었으나 북악산 전면개방 이후 숙정문의 관람이 허용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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