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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길(회화역~종각역) 2부 ; 백악산에서 광화문

사공(최명규) 2023. 1. 14. 11:11

북악산은 1.21사태 이후 군사상 보안문제 등으로 출입이 제한되어 오다가 참여정부시절인 2007년 4월 식목일을 계기로 성곽길(창의문-백악마루-숙정문-와룡공원)을 제한적으로 개방하였다. 나는 2009년 5월 신분확인 절차를 거쳐 창의문에서 와룡공원까지 정해진 탐방로를 따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지난달 다시 같은 코스를 다녀왔다. CCTV가 신원확인절차를 대신하는지, 2019년부터는 신분증명서 확인절차도 생략되었단다. 전 구간에 계단을 설치하거나 마포를 깔아 통행이 훨씬 편해졌다. 

1.21사태 당시 무장공비들이 북악산과 인왕산으로 도주하여 우리 군경과 교전이 있었는데, 한양 도성길 북악산 구간 백악마루와 청운대 사이 소나무에도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로 부르고 있으며, 총탄자국을 메워 ‘관리’해오고 있다. 

출처 : 뉴스버스(Newsverse)(https://www.newsverse.kr)

북악산(北岳山)은 서울의 경복궁 북쪽에 있는 으로,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한다. 인왕산낙산남산 등과 더불어 서울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 기반암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약 342m이다

.2009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67호 서울 백악산 일원(서울 白岳山 一圓)으로 지정되었다.

백악산은 한양의 북현무에 해당하는 북쪽 주산으로서 조선왕조가 도성을 정하였던 사상과 지형적 기본원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수려한 자연과 문화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자연유산이다.

서울이라는 고도의 체계적인 도성 조형원리, 풍수로 상징되는 사상적 체계를 구체화한 역사적 유적으로서의 가치가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의 후원으로서 소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시대 경관 조성의 원리를 간직하고 있어 역사 문화적 가치가 뛰어난 경승지이다[위키백과에서]

 

자하문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1] 왕들이 경복궁에들어갈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걸어다니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으나 인조가 일으킨 인조반정때 문을 여는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들어와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정도로 위험한 문이다(?)

역사[편집]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2]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3]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4]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5]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6]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7]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8][주 2]

보존[편집]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남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홍예문 천장에는 지네의 천적인 을 닮은 봉황이 그려져 있다.[9] 평시에는 문을 닫아 두었다고 한다. 다만 '군사들에게는 개방하라'는 세종의 명에 따라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에 한하여 통행이 허용되었고 사냥하러 나가는 왕과 왕실 종친들만이 은밀하게 이용하는 비밀의 문이 되었다. 국가적인 공역(工役)을 수행할 때같은 긴요한 경우에만 성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1506년(중종 1년) 백성들의 불편을 해소하고 물자운송에 편리를 돕기 위하여 다시 개방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해 9월 3일 혜화문과 창의문을 그대로 닫아 두기로 한다는 것만이 나올 뿐이다.[10]

또한 자하문 고개에서 바라보는 도성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경회루가 우뚝 솟아있고 멀리 숭례문이 시야에 들어오고 좌 백악 우 인왕을 끼고 목멱산(현 남산)을 바라보면 별천지에 온 느낌에 잠시 쉬었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자하문이라는 별칭은 인왕산 자락의 계곡 이름에서 유래하였다.[출처 필요] 이 이름을 본따서 상명대학교에는 '자하관'이라는 강의동 건물이 있으며, 대학은 자하(紫霞)라는 이름의 교지를 발행한다.

윤동주 문학관

윤동주문학관(尹東柱文學館)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문학관이다. 종로문화재단이 운영하고 있으며 폐기된 상수도 가압장을 리모델링하여 만들었다.[1] 2012년 7월 25일 개관하였다.[2]배경[편집]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재학하던 시절 기숙사에 들어갔다가 1941년 5월 벗이자 후배인 정병욱과 함께 기숙사를 나와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의 소설가 김송 집에서 하숙하였다.[3] 후일 국문학자가 된 정병욱은 윤동주로부터 증정받은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를 보존하여 해방 후 출간하였으며[4] 누상동 하숙 시절을 추억하며 동주 시의 여러 명편들이 이곳에서 씌어졌음을 증언하였다.[5] 종로구는 윤동주가 잠시 거처하였던 인연을 살려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하였다.[6]

윤동주 문학관이 들어선 곳은 원래 청운아파트를 위한 상수도 가압장이었다.[1] 청운아파트는 서울 도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로, 1969년 서울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주택난 해소를 위해 11동 557가구 규모로 지어졌다.[7] 1995년부터 아파트의 구조가 안전하지 않다는 진단이 있었고, 재건축을 시도하였다가 포기하여 철거하기로 하였다. 아파트를 철거한 자리에는 청운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8] 청운아파트는 2005년 9월 완전 철거되었고 공원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7] 청운공원 조성은 서울의 낙산공원을 비롯해 총 8개 지구 63개동의 아파트 철거 및 녹지 환원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사업으로, 이로서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철거만 된 도봉시민아파트를 제외하곤 모두 공원화가 완료되었다.[9]

청운공원의 조성 후에도 가압장은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리모델링을 통해 윤동주문학관이 지어지게 되었다.

자하문에서 차로 접근하기엔 어렵지 않지만 경기상고 부근에서 골목길을 따라 차로 접근하려면 비포장의 엄청난 급경사 골목길을 통과해야 한다. 네비로 청운 어린이집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중교통으로는 경기상고 정류장에 하차 후 맞은편 보이는 급경사 골목길을 따라가면 도착하고, 7022번 버스를 탈 경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하차하고 표지를 따라가면 금방 갈 수 있다.

자하문 초소[32]에 당도한 124 부대원 31명은 9시 50분에 이곳을 지키던 종로경찰서 소속 형사 2명에게 첫 검문을 받게 된다.[33] 부대원들은 "우리는 CIC (당시 육군 방첩부대) 소속 대원이다. 특수훈련을 마치고 복귀 중인데 방해하지 말고 비키라." 고 다그쳤지만 형사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통에[34] 시간이 지체됐고 무전으로 연락을 받은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경찰 병력이 그들의 진군을 막아섰다.[35] 이때 서울특별시 시내버스 2대가 길을 따라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이를 군의 지원 병력으로 오인한 124 부대원들은 경찰 병력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버스에 수류탄을 던진 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김신조의 회고에 의하면 버스에 국군 병력이 대거 타고 있다고 오인하여 벌인 일이라는데 사실은 그냥 시내버스였다. 시간도 야간이라 헤드라이트 빛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도 않으니 패닉하여 무작정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31명 중 조장 김종웅이 최규식 총경을 향해 기관단총을 발사하면서 교전이 시작되었다. 최규식 총경은 지근거리에서 총탄 여러 발을 맞아 현장에서 전사하였고 검문을 하며 시간을 끌던 형사 정종수 경사[36]는 동료 형사와 함께 무장공비 1명을 생포하였으나 이후 후퇴하는 공비들의 총에 중상을 입고 이후 치료 도중 사망한다. 그 외에도 많은 경찰이 부상 당했으며, 버스에 던진 수류탄 때문에 시내버스 버스기사 포함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37] 여기서 생포된 무장공비 김춘식 소위[38]는 치안국으로 압송되어 무장해제를 받던 도중 실수로 수류탄 핀이 뽑히는 바람에 어처구니 없게 폭사했다.(결국 사살에 포함)[39]

그 뒤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29명 사살, 1명 투항(김신조 소위), 미확인 1명이 생포되었다. 우리 측의 피해도 상당했는데 최규식 서장을 비롯하여 제1보병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40][41]이 교전 중 피격당해 전사했고, 특히 도주 과정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여러 건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예정이던 여성이나 경복중학교(현 경복고등학교)의 수위 등 일반인, 심지어는 참관 및 작전 지도차 온 주한미군 병사도 사망할 정도였으니... 결과적으로 의도가 있었든 아니었든 무고한 민간인들도 희생 당하기는 했다. 총 32명 사망(군 장병 25명, 민간인 7명)에 52명이 부상을 당했다.[위키 백과에서]

광화문

광화문(光化門)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1] 1395년에 세워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다.[주해 1]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다.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는데 왼쪽 문은 무신이, 오른쪽 문은 문신이 출입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고, 왼쪽 문에는 거북이가, 오른쪽 문에는 천마가 그려져 있다.[2] 경복궁 근정전으로 가기 위해 문 3개를 지나야 하는데, 그 중 첫째가 광화문이고 둘째는 흥례문, 셋째는 근정문이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에 공개되었다.역사[편집]조선 초기[편집]

광화문은 1395년(태조 4년) 경복궁과 함께 지어졌다. 창건 후 정도전은 남쪽에 있어 '오문'(午門)이라 불리던 문의 이름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이는 중국에서 천자의 문을 '단문'(端門)이라 할 때 단(端)이 바르다(正)는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다.[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남문(南門)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여 남문이라는 이름도 사용된 것으로 본다. 이후 태종이 정문을 포함한 경복궁의 축을 중심으로 육조거리를 조성함으로써 조선의 주요 관청이 광화문을 중심으로 배열되었다.[4]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1425년(세종 8년)에 처음 지어졌다. 태종이 창덕궁을 짓고 거기에 이어해 집무를 본 까닭에 경복궁은 퇴락했고, 세종은 태종이 세상을 뜨자 경복궁으로 정궁을 옮겼는데 옮기며 여러 전각의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이다. 이름은 집현전 학사들이 지어 올린 것으로, 이 때 금천교와 여러 문의 이름도 함께 지었다.[5][6]

당시 광화문은 중층 문루로 지어졌으며, 누각 안에는 종과 북을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려 시간을 알렸다.[7] 1474년(성종 5년)에는 근정문, 홍례문(흥례문), 광화문에 청기와를 덮으려 하였으나 검소한 덕이 아니라는 정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8]

겸재 정선이 18세기에 그린 경복궁도. 아래 광화문의 석축 4개가 남아있다.

태조때 지은 광화문은 1592년(선조 25년)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전체가 소실될 때 함께 파괴되었다. 이후 광해군이 정궁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김에 따라 경복궁은 복원되지 않고 폐허로 남아있게 된다.[4] 다만 1747년(영조 23년)에 흥천사명 동종을 옮겨 광화문에 걸고,[9] 정조 통치기에는 종을 쳐 백성의 억울함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경복궁 중건[편집]

 

오가와 카즈마사가 촬영한 1880년대의 광화문.

1865년(고종 2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된다. 공사는 3년 후인 1868년 완료되었다. 광화문의 경우 다른 전각들보다 우선 지어져, 1865년 10월에 상량이 이루어졌다. 상량문 제술관은 이유원이 맡았다.[10] 상량에 앞서 9월 17일에는 광화문의 현판 서사관을 정했는데, 임태영이 맡았다.[11]

광화문의 삼문 중 중앙의 것을 정문(正門), 서측의 것을 서협(西挾), 동측의 것을 동협(東挾)이라 하는데, 서협의 초루(譙樓)에는 흥천사 동종을 옮겨와 1865년 11월 9일에 걸어 경점(更點)을 알렸다.[12] 또한 이 시기에 각 문에 문배(門排)를 걸어

백악산 정상에서 창의문으로 내려오는계단길은 급 경사라 위함구간이다, 겨울인데도 별 어려움없이 조심조심 내려와 청운공원 윤동주 서시 앞에 선다, 시내를 내려다보며 휴식하고 청와대 앞으로 내려와 고궁벽을 따라 광화문까지 왔는데 역시나 광화문 조망은 장해물 때문에 이번에도 별로다, 언제쯤 광화문 앞은 제모습을 찾을지 가림막이 치워젖으면 좋갰다,외국사람들이 보고있으니끼???  종각역까지 걸어서 오늘일정을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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