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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옛길 의주길 제1길 ; 벽제관 길

사공(최명규) 2023. 2. 12. 15:11

의주길의 완주를 목표로 2023년 2월 11일

삼송역(지하철 3호선)에 내렸다,준비를 마치고 코스에 진입한다, 작고 넑은 골목길,? 오랬만에 마주한 어린시절 뛰어 놀든 풍경에 먼저 반가웠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어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실것만 같다,좁은 골목길은 뒷 산으로 넘어가는데, 그기에 벽화가 정성스럽게 그려저 있다, 그 길 끝에는 부대 입구이고 한때는 붐비던 큰길인데 직선도로가 나면서 뒷길이 되어 있다, 그 길을지나 작은언덕(토성)에 오른다, 

오금천변에서 덕명교비를 만난다, 퇴색된 비석에는 비석에 얼힌 이야기가 빼곡하니 수록되있어 그때의  발자치를 느껴본다, 길은 옛길 답게 옛 사람들의 흔적을 만난다,  그 두번쩨는 송강 공릉천 공원, 그 유명하신 송강 정철 선생님의 얼을 새겨놓은 공간이라 아무도 없는데도 조심스럽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목적지에서 만난 벽제관 터  건물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지만 넓은 터와 나이를 알 수없는 넑고 우람한 향나무가 쓸쓸이 지키고있고 말이 없다, 오늘은 역사속을 헤메다 집으로 돌아간다 [편집자 주]

벽제관길(삼송역 ~ 벽제관지)

의주와 대륙으로 향하는 첫 관문!벽제관길은 서울에서 의주와 대륙을 향하는 첫 길입니다.
사람들은 이 길에서 멀리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배웅했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 역시 이곳에서 영접을 받았습니다. 벽제관길의 중심인 벽제관은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도성으로 들어오기 전에 하룻밤 쉬어 가던 길이었습니다. 한편 삼송역에서 멀지 않은 숲길에서는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조선의 국경 문제를 매듭지은 주인공 역관 김지남의 묘를 만날 수 있으며, 공릉천 부근에서는 고양군민들이 힘을 모아 공릉천에 다리를 세워 의주대로를 탄탄대로로 만든 사람들의 기록이 담긴 덕명교비를 볼 수 있습니다. [경기옛길 홈페지에서]

덕명교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2호)

한양과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의주대로 구간 중 공릉천 위에 다리를 놓으면서 그 자세한 사항을 기록한 비입니다. 비의 건립자는 이한, 유후성, 윤면지, 이상식, 홍시우를 대표로 한 760여 명의 주민입니다. 특히 수십 명의 인명이 이두 문자로 기록되어 있어 이두 문자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비의 건립 연대는 1658년(효종 9)이며, 고양시 공릉천 일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비석입니다.[경기옛길 홈페지에서]

정철(鄭澈, 1536년 12월 18일(음력 12월 6일) ~ 1594년 2월 7일(1593년 음력 12월 18일))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이자 정치인이며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 · 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총마어사(驄馬御史), 동인백정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沉)의 아들[1]이며,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인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정여립의 난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동인에 대한 그의 처결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동인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2][3] 동인들로부터 원한을 많이 샀다. 또한 서인의 정권 재장악을 위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세자 건저문제(1591)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알콜중독으로 업무를 소흘히하다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가서는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가짜 정보를 올린 일로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당색으로는 서인의 지도자였고, 이이, 성혼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송순 · 김인후 · 기대승(奇大升) · 임억령 · 양응정(梁應鼎)의 문인이다. 《관동별곡》(關東別曲) 등 가사와 한시를 지었으며, 당대 시조문학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윤선도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위키백과에서]

고양 벽제관지(高陽 碧蹄館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지이다. 1965년 2월 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고양시의 고읍치(古邑治)는 벽제관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읍치를 옮긴 인조 3년(1625)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의 벽제관이다. 당시 규모는 면적 1,265평, 건물은 601평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언제 다시 건물을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일부가 헐렸고 6·25 때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頹落)해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객사의 윤곽과 터, 그리고 7척(尺) 간격으로 원좌주초석의 장대석(長臺石)이 남아 있을 뿐이다 [위키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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