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세상/산행 사진

미륵리 사지 3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한]

사공(최명규) 2011. 2. 8. 20:46

미륵사지

월악산국립공원 내 하늘재 아래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사찰지로 현재
파손된 사원 안에 석불입상이 서 있고,그 앞으로 역시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 지는

8각 석등이 있고 석등의 전면에는 미륵리 5층석탑으로 알려진 석탑이 1기가 존재하는

단탑가람(사원)배치의 형식을 갖춘 사지이다.


일찍부터 석굴사원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발굴과정을 통해 많은

유구와 유적이 발견되어 이 미륵당이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보이고 있다.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과 같이 더운 기온을 피하기 위하여 석굴에 사원을 만들지만

우리나라에는 석굴사원과 같은 양식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한다.

 

다만 경주의 토함산 석굴암만이 유일무이 하다고 했는데 미륵당 역시 석굴사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 경주 석굴암 복원 과정에서 참고로 이 미륵리 주실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석굴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서는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으며

고려후기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의 이름은 미륵대원(彌勒大院)으로 고증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와 누이 덕주공주 남매가 왕권회복을 도모코자 강원도 한계산성으로 가는 도중

미륵사와 더불어 세웠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경주를 떠난 마의 태자일행은 망국의 한을 안고 신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병사를 양병코자 금강산으로 길을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르게 되었다.일행은 그곳 계곡 깊은 곳에 야영을 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 날밤 왕자는 관음보살을 만나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관음보살은 왕자에게 말하기를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세우고 그 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리니 포덕함을
       잊지말라].

 

 

잠에서 깨어난 마의 태자는 꿈이 신기하기에 누이동생인 덕주공주를 불러 꿈의 얘기를 전하고

그 내용을 물었더니 놀랍게도 같은 시각에 공주 역시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

 

두 남매는 맑은 계곡물에 손과 입을 씻고 서천을 향해 합장배례한 뒤 다음날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으니

고개마루턱 큰 바위에 한 권의 황금빛 포경문(布經文)이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일행은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곳에 파란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이 보이는 장소를 택해

석불입상을 세우고 별빛을 받고 있는 최고봉 아래에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리고는 8년이라는 세월을 이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공주는 만족하였으나 마의태자는 그러하지 못하였다.

태자는 공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고 한계산성을 향해 떠났고 마지막 혈육인 오빠와 헤어진
공주는 절에 몸 담고 아버지인 경순왕을 그리워하며 태자의 건승을 빌었다 한다.

그러하기에 미륵리 석불입상은 마의 태자의 상이요 덕주사 마애불은 덕주 공주의 상으로 두 남매가 마주보기 위해 마애불은 남향이고,

 석불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고하며 이들은 일년에 한 번씩 서기를 하여 서로 만난다고 한다.

실례로 북향하고 있는 불상을 찾아보기란 힘들며 또 한편으로는 석불을 비롯하여 석축 전체가 화재에 큰 손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륵입상 두상부분은 전혀 불에 탄 흔적이 없이 매끄러운 형태로 남아 있는 점도 이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충청북도 충주 상모면 미륵리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리사지(사적 제 317호). 남한강 줄기를 끼고 있는

충주 지역을 중원(中原)이라고도 하는데 안내판에는 ‘중원 미륵리 사지’로 표기되어 있다.

 

 중원은 말 그대로 ‘국토의 중심부’라는 뜻인데 이 일대가 삼국의 중요한 전략적 기지였음을 근처에 널려있는 국보국 유물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수안보로 향하는 길목에만도 중앙탑으로 알려진 탑평리 칠층 석탑이 있고, 중앙탑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용전리 입석마을에는

중원 고구려비가 있다.

그래서 충주지역에 형성된 문화권을 중원 문화권이라 하며 고대 삼국의 국경과 문화가 서로 마주쳤던 접점지역이기도 했다.

미륵리사지는 충주와 수안보를 거쳐 지릅재와 하늘재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미륵리사지는 포암산, 신선산, 주흘산, 월악산 등

 각각 동서남북의 네 산의 기운이 모여드는 지점에 위치한 명당 중의 명당이다.

미륵리사지는 오랫동안 폐사지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이 절의 정확한 명칭이나 건립 시기 등에 관한 자료는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197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미륵당(彌勒堂)’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면서 사찰의 역사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