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세상/산행 사진

동해 바다 1박 2일 5 [낙산사 원통보전과 사천왕 문]

사공(최명규) 2011. 7. 13. 18:07

 원통 보전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낙산사가 관음성지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원통보전은 원통전(圓通殿), 혹은 관음전(觀音殿)으로도 불리며,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봉안한다.

지난 2005년 대형 산불로 소실된 낙산사 원통보전은 전쟁직후인 1953년, 당시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관음보살의 원력으로 치유하기 위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관심과 군인들,

지역민들의 노력으로 복구된 것이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 따르면,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다.

원통보전 내에는 건칠관세음보살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는데, 2003년 2월 3일

보물 제 1362호로 지정되었다. 후불탱화로 아미타극락회도가 걸렸으며 그밖에 관음상 주위로는

오른쪽에 신중탱화(1959년)와 동종(銅鐘), 사진본으로 된 의상대사 진영 등이 조성되었다.

2005년 4월 화마로 원통보전은 완전 소실되었으나, 주지 금곡 정념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의 노력으로

건칠관세음보살상은 안전한 곳으로 봉안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낙산사 홈페지에서]

 

 

 

 

 7층 석탑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조선시대 석탑으로서 현재 보물 제499호로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는 조선 세조 대 (재위,1455∼1468)에 중창되었는데 이 탑도 그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비록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있으나 대체적으로는 탑의 상륜(相輪)부분까지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어 조선시대 불탑 연구에 훌륭한 자료가 된다.

탑의 양식을 살펴보면, 평면은 방형(方形)으로서 기단석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위에 상륜부가 마련된 구조를 하고 있다.

기단석(基壇石)은 지면에 2단의 층을 이룬 지복석(地覆石)과 그 위의 복련(伏蓮)이 조각된 지대석(地臺石)으로

구성되었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우주(隅柱)가 새겨지지 않았고, 그 위에 얹은 뚜껑돌인 갑석(甲石)은 아래 위가 수평인

하나의 돌로 된 판석(板石)인데, 그 밑에 부연(副椽)과 2단의 각형(角形) 고임이 있다.

기단 상면에는 겹잎〔複蓮〕의 복련(覆蓮) 24잎이 조각되었다. 

이 탑은 전체적 양식은 강릉시 내곡동 403번지에 있는 보물 제87호 신복사(神福寺)터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이 탑은 한국전쟁 당시 손상되었으나 1953년 4월 이형근 장군이 낙산사를 중건할 때 함께 재건되었다.

현재 탑의 크기는 전체 높이 620㎝이다.  [낙산사 홈페지에서]

 

 

 

 

 

 

 

 

 

 

 

 동종

산불로 소실되기 전 고향당 옆 종각에 보존되어있던 종으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었다.
조선시대인 1469년(예종 1)에 낙산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세조를 위해 그의 아들인 예종이 만들게 한 범종이다.

이 범종의 양식을 보면, 종신(鍾身)은 중앙에 세 줄로 된 굵은 띠를 옆으로 돌려서 몸체를 위 아래로 구분했다.

보통의 범종에서는 띠 윗부분에 놓이는 유곽(乳廓)과 열뇌(乳頭)가 생략된 것이 특색이며,

그 자리에 보살상 4체를 양각했고, 그 사이에 범자(梵字) 네 글자씩을 역시 양각으로 배치했다.

보살상은 두광을 갖춘 채 연화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두광·보관(寶冠)·천의(天衣) 등의 표현이 모두 유려한 솜씨로 되어있다. 보살상 위와 종뉴 바로 아래에 있는

어깨띠〔肩部〕부분에는 또다시 범자 열여섯 자를 양각으로 돌아가며 배치했으며,

이 범자 위로 연잎 서른여섯 잎을 새겨 넣었다. 

이 작품은 조선시대 범종 가운데 16세기 이전에 조성된 드문 예 가운데 하나로서, 당대의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크기는 전체 높이 158㎝, 입지름 98㎝이다. 동종은 2006년 10월에 복원되어 현재 종각에 봉안되어 있다.  
[낙산사 홈페지에서]

 

 

 

 

 

 홍예문

 

원통보전을 나와 조계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나가다보면 일주문 못미쳐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인

홍예문(虹霓門)이 있다.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누각은 산불로 인해 소실되었다.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걸치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낙산사 홈페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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